코로나 19로 공연이 취소돼 의기소침한 정동극장 예술단원들 앞에 백 년 동안 공연장을 지킨 광대들과 오방신(극장신)이 나타난다. ‘100년 전에도 이랬었지.’ 먼 옛날 역병으로 야심 차게 준비했던 무대를 계속 미루고 또 미뤄야 했던 선배들(?)이 텅 빈 공연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렇게 시공간 무너진 틈새로 백 년의 시간이, 시공을 초월한 광대들의 삶이 펼쳐진다.
국립정동극장이 오는 22일부터 11월 7일까지 선보이는 ‘소춘대유희-백년광대’는 정동극장의 역사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봄날에 펼쳐지는 즐거운 연희’라는 뜻의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는 1902년 고종의 50번째 생일과 즉위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기획된 공연이다. 지금의 정동극장 인근 터에 설립된 ‘협률사’라는 극장의 창립작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유료 무대 공연이었다.
협률사는 1908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이를 계승한 게 오늘의 정동극장이다. 단순히 ‘극장 전신의 창립작’을 소재로 한 것은 아니다. 소춘대유희에 얽힌 사연은 2021년 지금의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당시 황실 차원에서 전국 팔도의 춤 잘 추고 노래 잘한다는 예인들을 모두 모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이 공연은 제때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서울에 콜레라가 창궐하고 도성에 전염병이 확산하면서 일정이 거듭 연기된 것이다. 무대를 향한 갈증과 고된 기다림을 모를 리 없는 이 ‘극장 귀신들’의 등장은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연출가 안경모는 최근 정동극장에서 열린 제작 발표회에서 “1902년 당시의 모습과 지금이 닮았다”며 “코로나로 갈증이 많은 시대에 한껏 웃고 즐길 공연을 만드는 게 공연 예술인으로서 시대적 소명이라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동 일대는 과거 위에 현재가 퇴적층처럼 쌓여 있는 곳”이라며 “공연 역시 과거의 단순 복원이 아니라 악가무희극의 전통성을 현대에 어떻게 펼쳐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반영돼 있다”고 전했다.
판소리와 민요, 전통 춤, 전통 기예 등은 기본이고, 여기에 정동극장 예술단의 끼, 몰입감 높은 무대를 위한 다양한 현대 기술이 더해진다. 화려한 미디어아트와 입체 사운드, 기존 프로시니엄(전면 무대와 반대편 객석으로 이분된 공연장) 형태를 벗어난 색다른 공간 구성이 실감 나는 공연을 완성한다. 특히 홀로그램과 딥페이크 등을 동원해 백 년 전 실존 명창을 재현하고, 크로마키로 광대들의 공연을 재구성하는 작업에는 BTS와 블랙핑크, 싸이의 콘서트에서 미디어아트를 선보인 영상 아트디렉터 유재헌이 참여해 눈길을 끈다.
대본을 담당한 강보람 작가는 “국가적 행사를 위해 모였다가 전염병 탓에 기다리기만 하던 사람들이 ‘경비라도 벌 수 있게 공연하겠다’고 해 1902년 12월 비로소 소춘대유희가 공연됐다”며 “당시 전염병과 마주했던 광대들이 오늘날의 시국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이야기를 짜맞추다 보니 광대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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