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나는 제작하기 쉽지 않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자기 자신을 말하기>란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누구나 출연할 수 있지만, 출연자 모두 지켜야 할 엄격한 규칙이 한 가지 있다. 그 규칙은 자기 자신을 말하되 특정한 ‘단어’ 몇 가지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이라는 단어를, 서점 주인은 ‘서점’이라는 단어를, 라디오 피디는 ‘라디오’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 즉 그 단어 없이는 자기 자신을 말할 수 없거나, 자기 자신이 더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단어가 금지되는 것이다. 그 금지 단어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피디가 아니라 출연자 자신뿐이다. 자기 자신을 말하기 이전에 자기 질문이 있는 것이다.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2021년 위고 펴냄)
라디오 피디인 정혜윤 작가가 기획한 이 독특한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나의 금지 단어는 무엇이 될까 생각했다. 아마 ‘책’과 ‘가족’이 될 것 같다. 누구나 이것이 없으면 내 인생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믿는 단어나 사람, 일이 있을 것이다. 마치 명함이나 신분증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단어를 언제든 쉽게 뽑아서 남에게 건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로 나를 말하려면 처절한 자기 질문과 고민이 있어야 한다.
나의 직업,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이자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외의 나머지가 잘 떠오르지 않는 삶은 두렵다. 내 인생에서 없어져서는 안 될 것이라 지금은 굳게 믿고 있을지라도, 언젠가 우리는 모두 그것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날들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다 잃어버린 다음의 ‘나’일 것이다. 내게 절대적인 것들은 뺄셈이나 나눗셈을 해보고, 소소하고 부가적인 즐거움들을 주섬주섬 모아본다. 언젠가는 이 소소함이 나를 지키는 주제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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