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사회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단호한 비판을 꾸준히 해온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신작이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 급변과 혼란 속에 방향 감각을 상실한 현대인들이 새로운 목적지를 찾는 데 도움이 될 키워드로 ‘리추얼(ritual)’을 꺼낸다. 리추얼을 우리 말로 치환한다면 의례, 의전, 전례, 의식, 축제, 잔치 등이 이에 해당 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단편적 어휘보다는 ‘삶을 더 높은 무언가에 맞추고 그럼으로써 의미와 방향을 제공하는 상징적 힘’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오늘 날 정처 없는 삶을 단단히 고정할 수 있는 닻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게 리추얼이다. 일정한 형식과 규칙에 몰두함으로써 자아를 탈내면화하고, 타자와 주변 사물, 세계와 관계 맺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게 리추얼이다. 이런 리추얼이 오늘날 사라졌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이유는 뭘까. 신자유주의 세상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끊임 없이 강제된다. 디지털의 발전은 소통의 끈을 약화시킨다. 공동체를 굳건하게 만들던 공동의 느낌은 점점 먼지처럼 가벼워져 부유한다. 리추얼이 현재보다 단단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다. 과거 우리를 지탱했던 리추얼의 부재를 인식하면 새로운 지향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인을 닮은 철학자의 현대 사회 고찰은 솔직히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역자 전대호의 조언대로 시를 읊듯 여러 번 읽다 보면 철학자의 호흡에 천천히 속도를 맞춰 나갈 수 있다. 1만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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