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이 8조 원을 들여 일본 히로시마현에 D램 공장을 건설한다. 일본 정부는 3,000여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이 공장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TSMC가 발표한 구마모토현 공장 설립에도 5조 원 넘는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잇단 글로벌 기업 유치로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려는 일본 정부의 청사진이 빛을 보게 됐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일본이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의 50%를 차지했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 반도체 완제품 업체는 낸드플래시 2위인 기옥시아 하나에 불과하지만 소재·장비 분야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다. 일본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될 위험을 무릅쓰고 글로벌 업체들의 완제품 공장을 유치한 뒤 자국 기업과 결합해 ‘반도체 생산 서클’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소재·장비 업체들이 자국 공장 우선 공급에 나선다면 우리 반도체 업체들은 언제든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산업 패권 전쟁 속에서 우리 기업들을 긴장하게 하는 또 다른 움직임은 빅테크 업체들의 반도체 독자 개발이다. 애플과 구글이 인텔·퀄컴 등과의 인연을 접고 자체 칩 개발에 나선 데 이어 마이크로소프트(MS)는 AMD 등으로부터 반도체 개발자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제조 패러다임이 급변하고 있지만 우리 환경은 달라질 기미가 없다. 반도체 산업 지원안을 담은 국가핵심전략산업특별법은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 대학 정원, 화학물질 등록 기준, 수도권공장총랑제 등의 규제 사슬은 공고하다. 정부와 정치권은 ‘뒷북·맹탕’이라는 지적을 받는 특별법부터 전면 수술해 최대한 빨리 통과시키고 실행에 들어가야 한다. 말로만 ‘경제 안보’를 외치며 뒤에서는 느긋한 자세를 이어간다면 ‘반도체 코리아’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