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건너갔던 전직 배우 상옥(이혜영 분)은 며칠 전 한국으로 돌아와 동생 정옥(조윤희 분)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두 사람은 자매지만 서로 모르는 게 많고, 오래 떨어져 지내는 동안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정옥은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언니에게 원망스러운 감정도 있다. 상옥은 정옥과 산책하고 조카의 가게도 들렀다가, 과거에 살았던 이태원 집을 찾아 과거의 흔적을 더듬기도 하고, 인사동에서 자신을 캐스팅하고 싶다는 영화감독 재원(권해효 분)과 낮술도 한다.
홍상수 감독의 26번째 장편 영화 ‘당신얼굴 앞에서’는 상옥의 하루를 따라간다. 2018년작 ‘강변호텔’에 이어 다시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지만, ‘강변호텔’이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불안감을 바라본 것과 달리 이번 작품은 순간마다 삶을 예찬하며 일상의 소중함을 상기시킨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옥은 길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도, 동생과 산책을 하는 것에도, 조카 승원에게 받은 선물에도 감사해 한다. “얼굴 앞에 천국에 숨겨져 있다”는 대사를 비롯해 중간 중간 나오는 상옥의 기도 내레이션은 현재의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지키는 데 집중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낸다.
홍 감독은 이번에도 대화와 술자리 같은 사소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작지만 눈에 띄는 순간의 차이를 드러내 왔던 연출을 고수한다. 하지만 직전 작품인 ‘인트로덕션’에 이어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보다 한결 따뜻해졌다. 홍상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술자리 장면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과거 작품에서는 웃음기 섞인 서늘한 시선으로 실소를 유발했을 법한 상황에서 홍 감독은 일종의 위안을 선사한다. 상옥과 재원이 고량주 몇 병을 비운 후 취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감정적 클라이맥스가 대표적이다.
연기 경력 40년이 넘는 베테랑 이혜영은 홍 감독과의 첫 작업에서 수수한 차림으로도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 특유의 톤과 억양은 자칫 심심해질 수 있는 영화의 분위기를 상쇄해준다. 극중 배역의 처지와 맞물려서 영화 속에서 독특한 거리두기의 효과를 내기도 한다. 상옥이 카페에서 정옥과 대화하던 중 화제가 집, 부동산으로 옮겨가면서 자기만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순간 달라지는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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