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9일 대통령 선거까지 약 4개월이 남은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가 부동산 관련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부동산 정책 실패가 현 정부에서 가장 뼈 아픈 실책으로 기록된 만큼 임기 말 굳이 이를 부각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의혹 여파로 4·7 재보궐 선거가 여당의 충격적인 패배로 끝난 점을 감안하면 집값 문제는 이번 대선에서도 주요 변수 가운데 하나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으로 부동산 투기에 대한 관심이 또 고개를 들게 되면 여권에 또 다른 악재가 될 수도 있다. 정부는 당분간 가계대출 규제 등을 앞세워 부동산 문제가 정치 이슈화 되는 상황을 관리·차단하면서 대선 영향도 최소화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文대통령, 마지막 시정연설에서 부동산 언급 최소화
지난 25일 문 대통령의 내년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에는 부동산 관련 내용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새 비전 제시보다 국정 성과를 홍보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문 대통령은 ‘K반도체’ ‘K배터리’ ‘K바이오’ ‘K수소’ ‘K조선’ 등을 나열하며 신산업의 ‘K동맹’을 이뤄내겠다고 강조했다. 남은 임기 동안 코로나19 극복에 매진하겠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위기’ ‘경제’ ‘회복’ ‘코로나’라는 단어를 각각 33번, 32번, 27번, 15번이나 언급했다.
그러면서 정권 내내 국민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부동산 문제를 두고는 “여전히 최고의 민생 문제이면서 개혁 과제”라는 짧은 진단만 내렸다. 부동산 시장이 현재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에 따라 어떤 해법을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삼갔다. 지난 5월 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기자회견에서 “지난 4·7 재보궐선거를 통해 죽비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심판을 받았다. 부동산 가격 안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한 것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던 셈이다. 지난해 10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부동산 시장 안정, 실수요자 보호, 투기 억제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단호하다”고 강조한 점과 비교해도 발언 강도가 한참 낮았다. 임기 말에도 집값은 여전히 고공 행진을 벌이고 있는 데다 임대차 3법 이후 전세 시장마저 뒤틀리자 성과로 내세울 게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부동산 언급을 피하면서 정치적 중립 논란을 의식한 듯 대장동 의혹 역시 거론하지 않았다. 검찰·언론 개혁 등 다른 정치 현안에 대해서도 직접 언급을 삼갔다. 남북 관계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북한 관련 내용도 지난해 시정 연설 때보다 대폭 줄였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본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 “경제는 폭망했고 부동산 값은 천정부지 올라 주택 지옥이 돼 있는데 반성은 찾아볼 수 없는 자화자찬 일색이라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연설을 지켜봤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이 국회에 입장해 환담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장동 게이트 특검’을 촉구하는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도열해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박수현 “文, 집값 상승세 둔화 중이라 짧게 언급”
문 대통령이 부동산 문제를 단 한 문장으로 짧게 표현한 것을 두고 각계에서 비판이 쏟아지자 청와대는 곧바로 진화에 나섰다.
박수현 국민소통수석은 25일 YTN ‘뉴스Q’에 출연해서도 “국민이 느끼는 부동산 문제에 관한 정서를 고려하면 너무 짧다는 비판이 있는 것 같다”며 “집값이나 전세 이런 것들의 상승세가 둔화되면서 지역별로는 집값이 떨어지는 게 부분 부분 나타난다”고 알렸다. 박 수석은 “이 현상이 지속가능한지도 봐야 한다”며 “변곡점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하는 시점에서 대통령께서 부동산 문제를 말씀하시는 건 입장이 어려우셨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께서 가지고 계신 죄송함의 크기는 다른 어떤 것보다 천근의 무게처럼 느끼는 건 틀림없다”며 “간략히 언급했지만 그 안에 많은 뜻이 내포됐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고 주장했다.
박 수석은 26일에도 KBS 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와의 인터뷰에서 “부동산 문제에 대해 대통령께서 짧게 말씀하셨다고 비판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며 “피해 가려는 뜻으로 말씀을 짧게 하신 것이 아니다. 9월 둘째 주부터 매일 지표를 확인하고 있는데 부동산 가격의 상승세가 둔화되고 있고 지역에 따라서는 집값이 하락하는 곳도 좀 생기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어 “면밀하고 민감하게 보고 있는 시간이다. 어떤 변곡점이 온 것인지 판단을 해야 한다”며 “그동안 저희가 여러 정책을 하면서 ‘이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2년 이렇게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씀을 드려 왔는데 이것이 과연 정책의 효과인 것이냐 아닌 것이냐에 대한 판단을 민감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수석은 또 “대통령께서 부동산에 대해서 어떤 다른 말씀을 더 시정연설에 붙이시면 이 민감한 시기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최고의 민생 과제, 개혁 과제라는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시면서 짧게 말씀하신 것”이라며 “저희들은 주택 공급이라고 하는 문제를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최선을 다해 왔다. 입주 물량을 보면 과거 10년의 평균이 46만9,000호가 공급됐다면 2021년~2030년 10년은 56만3,000호가 공급된다. 수도권에도 과거 10년에 23만4,000호가 공급 됐다면 앞으로 10년은 31만4,000호가 공급이 되도록 돼 있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가격에 변곡점이 오고 있다고 청와대가 판단하고 있느냐’는 진행자 질문에는 “아직 그렇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대통령께서도 짧게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답했다. ‘정책의 효과와 다른 경제적 요인들이 합쳐져서 다음 정부에서는 빛을 발할 수도 있다. 부동산 가격이 조금씩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냐’는 추가 질문에는 “그렇다”고 말했다. 박 수석은 “택지 공급의 제한적 여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찾아왔다”며 “이것이 지금 시장에 다른 정책 수단과 더불어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지금 면밀하게 모니터링하면서 분석해 볼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이재명 만나서도 부동산·대장동 전혀 언급 안해
문 대통령은 26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만난 자리에서도 대장동 의혹은 물론 부동산 문제 자체를 꺼내지 않았다. 청와대 상춘재에서 이 후보를 만난 문 대통령은 이 후보에게 “당내 경선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신 것을 축하드린다”며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와의 회동은 아주 좋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전날 국회 시정연설을 거론하며 “내년도 예산은 다음 정부가 주로 사용할 예산이라는 점을 많이 감안하면서 편성했다”며 “대선 과정에서 좋은 정책을 많이 발굴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이 후보는 “나는 경기도지사로 문재인 정부의 일원”이라며 “문재인 정부가 성공하고 역사적인 정부로 남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이 후보는 또 문 대통령에게 “지난 대선 때 제가 모질게 한 부분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사과한다”고 말을 건넸다. 문 대통령은 이를 두고 “이제 1위 후보가 되니까 그 심정 아시겠느냐”고 답했다. 이 후보가 “전례 없는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참 놀랍다”고 말한 데 대해서는 “다행이다”고 말했다. 이 후보가 문 대통령에게 “얼굴이 좀 좋아지셨다”고 하자 문 대통령은 “이제는 피곤이 누적돼서 도저히 회복이 되지 않는다. 현재도 이 하나가 빠져 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일종의 극한직업이라 체력 안배도 잘해야 되고 일 욕심을 내면 한도 끝도 없다”고 조언했다.
회동에 동석한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은 춘추관 브리핑에서 ‘문 대통령과 이 후보 차담 중 대장동 관련 발언이 나왔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없었다. 대장동의 ‘대’ 자도 안 나왔다”고 강조했다. ‘대장동 의혹은 아니더라도 부동산 관련 언급은 없었느냐’는 물음에도 “부동산에 대해서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7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5년, 성과와 과제-소득보장과 복지전달체계’ 토론회에서 “사회지표를 보면 문재인 정부에 아직 과제가 많다”며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생률, 빈부격차, 부동산 문제 등 여러 미흡한 미완의 과제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잘한 것은 정리하고 부족한 것은 인정해 국민적인 공감으로 문제를 풀어나갔으면 한다”며 “이 후보를 중심으로 문재인 정부의 성과를 계승하고 보완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출 조이기’로 집값 관리 정조준…내년 대선까지 ‘시한폭탄’
문 대통령이 부동산 관련 언급을 자제하는 사이 정부는 ‘대출 조이기’로 부동산 시장 관리에 나섰다. 정부는 26일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를 개최하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조기 시행하는 내용의 ‘가계부채 관리 강화 방안’을 의결했다. 지난 4월 가계부채 관리 방안을 발표하고 7월에 시행한 지 3개월여 만에 나온 추가 대책이었다. DSR이란 소득 대비 갚아야 할 원리금 비율을 뜻하는 지표다. 주택담보대출 한도만 계산하는 담보인정비율(LTV)과 달리 신용대출과 카드론 등 모든 금융권 대출의 원리금 부담을 보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번 방안에 따르면 내년 1월부터 총대출액이 2억원을 초과할 경우 DSR이 적용된다. 나아가 내년 7월부터는 총대출액 1억원 초과로 DSR 규제가 확대되고 DSR 산정 때 카드론도 포함된다. 총대출액 2억원 초과에 대한 DSR 적용 시기를 내년 7월에서 내년 1월로, 총대출액 1억원 초과에 대해서는 내년 7월로 각각 앞당겼다.
제2금융권의 DSR 기준도 내년 1월부터 강화된다. 차주 단위 DSR은 제2금융권 기준을 60%에서 50%로 강화하고 DSR 계산 때 적용되는 만기를 대출별 '평균 만기'로 축소하기로 했다. 현재는 DSR 산출 때 대출만기를 최대만기 등으로 일괄 적용해 대출 기한을 늘릴 수 있다.
주택담보대출의 분할상환 목표치도 내년부터는 상향 조정된다. 개별 주택담보대출 분할 상환 목표가 내년엔 80%로 책정돼 분할 상환 압박이 커질 전망이다. 지난 6월 말 기준 주택담보대출 분할 상환 비중은 73.8%다.
아울러 금융사별 가계부채 관리 계획 수립 때 최고경영자, 리스크 관리 위원회, 이사회 보고가 의무화된다. 가계대출 취급 위반시 과태료도 부과된다. 각종 대출 약정 이행 실태에 대한 점검도 강화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내년 가계부채 증가율이 올해보다 낮은 4∼5%대 수준으로 관리되도록 하겠다”며 “전세대출은 올해 총량규제 예외로 인정하는 한편 내년 DSR 규제 강화 시에도 현재와 같이 DSR 적용대상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승범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부동산 시장은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고 부채 증가 속도는 추세치를 크게 넘어섰다”며 “앞으로도 가계부채 상황을 엄중히 점검하면서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미리 제시한 추가 검토 가능한 과제들을 적절한 시기에 시행하는 방안도 강구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간 수 차례 대출을 조이면서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부동산 시장 안정이 이번 조치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만약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면 이번 대선 만큼은 부동산이 지배하지 않는 선거가 될 수 있다. 반면 집값, 전세가가 또 요동을 칠 경우 부동산 이슈는 대선을 뒤흔들 최대 변수로 부각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여야 후보들이 얼마나 납득할 만한 대안을 내놓느냐가 대선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대장동 의혹을 비롯한 부동산 시장 안정 여부가 내년 선거의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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