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를 잡기 위해 미국이 꺼내든 비축유 방출 카드가 오히려 유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비축유 방출에 반발해 주요 산유국이 기존 증산 계획(하루 40만 배럴)마저 재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3일(현지 시간) 런던선물거래소(ICE)에서 브렌트유 선물은 전날보다 3.3% 상승한 배럴당 82.31달러, 서부텍사스산원유(WTI)도 2.3% 오른 배럴당 78.5달러를 각각 기록했다. 백악관이 비축유 5,000만 배럴을 풀고 한국과 중국·일본·인도·영국이 동참한다고 발표했지만 약발이 듣지 않았다는 의미다.
시장은 비축유 방출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경제 재개, 글로벌 에너지난으로 원유 소비가 빠르게 늘어 현재 원유 시장은 공급자 우위로 형성된 상태다. 결국 산유국의 증산 여부가 유가 안정의 핵심 변수라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OPEC+가 추가 증산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골드만삭스의 데미안 쿠발린 에너지 담당 전략가는 "OPEC+가 공격적으로 증산할 인센티브가 없다”고 지적했다. 최근 유럽이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봉쇄령을 재도입하는 상황도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오히려 비축유 방출을 주도한 미국과 산유국 간 갈등이 유가를 자극할 개연성이 크다는 입장이다. 그간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에너지 전환 정책을 이유로 자국 증산 대신 산유국에 증산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산유국은 이번 비축유 방출 결정에 발끈하고 있다. 당장 OPEC+는 기존 증산 계획까지 재검토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았다. 유라시아그룹의 헤닝 글로스테인 에너지 담당 이사는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과 OPEC+ 간의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며 “유가 변동성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사실 비축유 방출 규모는 시장 안정에 턱없이 부족하다. 미국(5,000만 배럴), 인도(500만 배럴), 영국(150만 배럴), 중국(733만 배럴 추정), 일본(420만 배럴 추정) 등을 합해도 6,800만여 배럴이다. 전 세계 하루 원유 소비량(1억 107만 배럴, 2019년 기준)의 절반 수준이다. 골드만삭스는 “새 발의 피”라며 “유가에 미치는 영향은 배럴당 2달러 미만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게다가 미국이 약속한 5,000만 배럴 중 3,200만 배럴은 스와프 방식으로 풀린다. 정유사가 언젠가는 정부에 되돌려줘야 한다. 역사적으로 봐도 비축유 방출의 효과는 미미했다. 지난 2000년 9월 유가가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며 배럴당 37달러를 넘어서자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3,000만 배럴의 비축유를 방출했다. 약 1주일 만에 유가는 30달러선으로 내려왔지만 그로부터 2주 뒤 다시 36달러까지 치솟았다.
결국 전문가들은 OPEC+ 회의가 열리는 다음 달 2일을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RBC캐피털마켓의 헬리마 크로프트 상품전략책임자는 “OPEC+의 입장이 원유 가격의 방향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변수"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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