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초 정부가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임기가 몇 달 남지 않은 정부 일이라 관심들이 없지만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각 부처가 소관 품목 물가를 책임지고 관리·대응하라는 물가부처책임제다.
타임머신을 타고 삼사십 년 거꾸로 간 기분이다. 지난 1980년대에 정부가 물가를 통제했는데 자장면값을 수년째 묶었던 기억이 난다. 자장면은 당시 손꼽는 외식 품목으로 물가지수 산정에 무시 못 할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경제기획원에서 가격 인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 발표에 따르면 교육부-학원비, 문화체육관광부-영화관람료, 금융위원회-자동차보험료, 보건복지부-장례비처럼 부처별로 물가를 책임진다. 중국·북한과 같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닌 나라에서 정부가 가격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발상이 기막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경제정책 방향이 경제 ‘정상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며 세계 10대 경제 국가가 됐다고 자랑하는 정부가 개발연대보다 더한 통제를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추진한다.
물가는 기본적으로 정부보다 한국은행이 다룰 사항이다. 한국은행법 제1조는 그 설립 목적이 물가 안정을 통해 국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의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인플레이션에 늘 신경을 쏟고 뉴스의 초점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정부든 한은이든 물가만 안정시키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부가 하는 건 물가를 잡는 게 아니라 ‘통계를 잡는’ 것이다. 학원비·영화관람료·자동차보험료 등 부처가 책임지는 품목은 소비자물가를 산정하는 460개 품목에 포함돼 있다. 부처들이 억지로 내리누르면 발표하는 물가 통계는 잠시 낮아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돈으로 살 수 있는 구매력을 나타내는 실질적인 물가 수준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물가 대책(?)은 세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통계 왜곡으로 사실을 호도한다. 정확한 통계는 연구, 분석, 정책 결정의 기반이며 선진국일수록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른 통계를 만든다. 폭등한 부동산 가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던 통계로 정부 신뢰가 떨어진 상태에서 소비자물가지표마저 비튼다면 국민이 아주 외면할 것이다.
둘째, 사태 해결을 미뤄 문제를 키운다. 정부는 치솟는 생산 원가에도 불구하고 전기 요금과 가스 요금을 동결해 원가를 요금 책정 기준으로 삼기로 한 원가연동제 원칙을 저버렸다. 기획재정부 차관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미봉책에 불과해 내년 1분기가 지나면 요금을 올릴 수밖에 없다. 늦어진 만큼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그때는 인상 폭이 더 커질 것이다.
셋째, 올바른 해결책을 외면하게 만든다. 물가 상승은 통화 팽창, 국제 원자재 가격 인상, 수급 불균형 등의 요인에 의해 발생하며 대부분 각 부처 장관의 권능 밖의 일이다.
정부가 내세운 내년 물가상승률 목표가 2.2%인데 부처책임제로 이를 달성하겠다면 꿈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1월 생산자 물가상승률이 9.6%인데 머지않아 소비자물가에도 비슷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미국에서는 연준이 돈을 풀어 자산 매입하는 규모를 줄이고 금리 인상까지 시사했다.
한국은행은 너무 많이 풀린 돈을 거둬들이고 정부는 방만한 재정 지출을 줄여야 한다. 발전 단가가 낮고 탄소 배출량도 적은 원자력 발전을 활용하는 것이 전기 요금을 실질적으로 낮추는 방안이다. 부동산 대책에서 익히 봐온 것과 같이 정부 규제로 가격을 안정시킬 수 없으며 수요에 맞게 공급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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