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통보를 받고 바로 속초 바다로 떠났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는데, 눈 아래 바다가 새카만 거예요. 지금 당장 뛰어내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무섭고 겁이 나더군요. 퇴직한 직후의 제 마음도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같은 곳에 가게 됐어요. 퇴직 후 1년 3개월쯤 되었을 거예요. 바다는 푸르고 바람이 시원해요. 그제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다는 그대로인데 내 마음이 달라졌구나.’ 정말 힘들 때는 힘든 것조차 모릅니다. 괜찮지가 않은데 괜찮은 줄 알고 지냅니다. 그게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그때 힘들었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기업 계열사의 영업담당 최고 임원을 지낸 K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담담하게 퇴직 심경의 변화를 들려줬다. 퇴직 이후에 겪은 마음이 전해져서 늘 안부가 궁금한 분이다. 그 후 6개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예측하지 못한 퇴직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K님의 경우, 갑작스러운 퇴직 충격에서 벗어나기까지 1년 반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오래 걸린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믿고 의지했던 회사로부터의 퇴직 통보는 당사자에게 그야말로 충격적인 경험이다. 화담,하다 리서치&스터디에 따르면, 퇴직 후 6개월 미만 퇴직자의 약 85%가 극심한 인지적 불안정 단계를 경험한다. 이 단계에서는 불안, 우울, 분노, 상실감 및 무력감 등 부정적인 마음과 해방감, 기대, 편안함 등 긍정적인 마음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데, 자발적 퇴직자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퇴직자가 이 단계를 경험한다. 회복되기까지 평균 1년 이상, 길게는 3~4년 이상 소요되기도 하는데, 이 시기가 길수록 커리어는 물론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가는 것에도 어려움이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자의 퇴직 적응 과정은 4단계로 구조화된다. 퇴직자 대부분이 1. 인지적 불안정 단계, 2. 자기 인식 단계, 3. 목표 구상 단계, 4. 목표 확정 및 실행 단계를 거치면서 삶의 다음 여정으로 나아간다. 40대 중반 이상 장기 직장 근속자 대부분이 퇴직 후 이 단계들을 거치는데, 처음 두 단계를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퇴직 이후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됐다.
퇴직 초기의 인지적 불안정 단계는 퇴직자의 직급, 퇴직의 자발성 여부, 이직 경험, 퇴직 사유 및 퇴직 당시의 절차적 공정성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예상하지 못한 퇴직으로부터 느끼는 부정적 정서는 시간에 따라 회복됐다가 새로운 자극에 의해 되살아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퇴직했던 계절이 돌아오면 그때의 상황이 상기되거나 자신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동료의 승진 소식을 접하는 등 외부 자극에 의해 정서적 침체기를 다시 겪기도 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퇴직자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잘 살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퇴직 적응 4단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퇴직 이후 1년 6개월 이상이 경과된 퇴직자들도 여전히 1, 2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퇴직 후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도 목표를 구체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약 65% 이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퇴직자 스스로 퇴직에 대한 명확한 현실 자각과 구체화된 실천 전략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본 퇴직 적응 4단계 진단 툴은 국내 최초로 300명 이상의 퇴직자 인터뷰 및 서베이와 전문가 패널에 의해 구체화됐는데, 자신의 퇴직 적응 단계와 솔루션이 궁금하다면 화담,하다 홈페이지에서 직접 진단해 볼 수 있다.
퇴직, 누구에게나 당연한 여정 vs. 경쟁에서 밀려난 서글픈 현실
왜 많은 사람이 퇴직 후 극심한 정서적 어려움에 빠지는가?
여기에는 퇴직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화적 배경이 깊이 연관돼 있다. 마치 정답이 정해진 것처럼, 이 사회는 ‘성공적인 삶’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존재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 나이에 맞게 인생을 꾸리고 퇴직 전 일정 규모 이상의 재무자산을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는 삶, 타인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도태되지 않는다는 강박이 존재해 온 이 사회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생존해 온 직장생활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끝난다면 어떨까.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와 함께, 정년이 보장됐던 고도성장 시기가 끝나면서 고용 구조와 인력 운영전략도 다변화될 필요가 있었으나, 개인의 퇴직 준비는 미흡하고 기업의 퇴직 지원은 여전히 일시적인 금전적 지원에 집중되어 있으며, 정책은 변화의 흐름을 적절히 반영할 만큼 구체화되지 못한 상황이다.
이런 현실 아래에서, 나에게 닥친 퇴직이 ‘다음 인생을 위한 당연한 여정’이 아니라, ‘경쟁사회에서의 패배’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퇴직 당사자는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기 힘들고 새로운 목표를 구상하고 실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악순환에 빠진다.
수오재(守吾齋), 퇴직 후 나를 지키는 힘
어떻게 다시 중심을 잡고 나아갈 수 있을까?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의 수필 수오재기<守吾齋記>에서 ‘나를 지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큰 형님이 자신의 집 서재를 ‘수오재 (나를 지키는 집)’라 명한 것을 두고 평소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귀양 중 어느 날, 드디어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나를 지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천하 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중략) 오직 나라는 것만은 잘 달아나서, 드나드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매년 12월, 수많은 직장인이 원하지 않는 퇴직을 현실로 맞이한다. 아마도 자신을 잃고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앞선 사례의 K님처럼 얼마나 힘든지조차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새로운 목표가 보일 것이라는 믿음과 현재 나의 퇴직 적응 단계를 명확하게 파악하여 퇴직 이후의 여정을 단계별로 재구성하는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지켜낼 모멘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퇴직자들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가장 먼저 살피는 계절이 되길 바란다. 퇴직 이후의 삶을 함께할 수오재를 곁에 둘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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