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친(親)러시아 인사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 한다고 영국 정부가 폭로했다. ‘괴뢰정권’을 수립해 우크라이나 체제 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 주재 대사관의 일부 인력을 철수시키고 카타르 등 중동 산유국과 유럽 가스 공급 협의에 나서는 등 ‘전쟁 발발’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다만 미국과 러시아·유럽 등 관계국들이 아직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지 않은 만큼 우크라이나 사태가 해소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23일(이하 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영국 외무부는 이날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친러시아 인사로 구성된 정권을 세우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이미 예브게니 무라예프 전 우크라이나 하원 의원을 잠재적인 괴뢰정권 지도자로 낙점했다고도 했다. 올해 46세인 무라예프 전 의원은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당에 대항하는 정당 ‘나시(Nashi)’를 이끌 정도로 친러 성향이 짙다. 그가 소유한 방송사 ‘뉴스원’은 러시아에 우호적인 보도를 해온 것으로 유명하며 지난 2017년에는 이에 불만을 품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시위대가 방송사를 점거하는 일까지 있었다.
영국 외무부는 또 다른 우크라이나 정치인 4명이 러시아로부터 ‘지령’을 받고 있다고도 했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정보기관과 협력한 혐의로 최근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은 인사도 포함됐다. 러시아 측은 이에 대해 “터무니없는 허위 정보”라고 반박했다.
러시아가 실제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우크라이나를 내부에서 무너뜨릴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점에서 이번 폭로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러시아가 군사행동뿐 아니라 사이버 테러 등을 가미한 ‘하이브리드 전쟁’에 나설 수 있다는 게 안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내란 조장’도 러시아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파블로 클림킨 전 우크라이나 외무장관도 최근 자국 안보 회의에서 “국경을 넘는 대규모 공격 외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파괴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방식이 문제일 뿐 현재로서는 러시아의 공격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CNN은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에 배치된 군인들이 “러시아가 쳐들어올 확률은 100%”라고 말하는 인터뷰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는 양국 군대와 무기가 속속 집결하고 있다. 미국도 대비 태세에 돌입했다. 키예프 주재 미국대사관은 모든 비필수 인력과 가족의 철수를 허가해달라고 미 국무부에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정부는 공식 부인했으나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주재 대사관의 인력 일부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지기도 했다.
미국은 또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완전히 차단할 경우에 대비해 카타르 등 산유국과 유럽 가스 공급 관련 협의에 나섰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전했다. 가스의 절반가량을 러시아에서 공급받는 유럽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대체 물량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상황이 일촉즉발로 치닫고 있지만 대화 창구가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날도 이견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가 주장하는 이른바 ‘안전 보장안’에 대한 답변을 조만간 서면으로 전달하기로 했다. 러시아에서 만족할 만한 내용이 이 ‘답변’에 담길 경우 사태는 급속도로 완화 국면으로 흐를 수 있다. 또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우크라이나와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외교정책 보좌관급 회담도 열 계획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