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솔로 가수 장기하입니다.”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로서 이보다 더 완성도 높은 앨범은 없을 거라며 박수칠 때 떠난 지 3년이 지나 첫 마디로 꺼낸 인사말이다. 해체 후 2년간 솔로 가수 장기하로서의 정체성을 심도 있게 고민했고,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끝에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정답은 내 목소리를 내 목소리답게 담는 것.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 있게 인사할 수 있었다.
솔로 가수 장기하의 자기소개서와 같은 EP ‘공중부양’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꾹꾹 눌러 담은 앨범이다. 타이틀곡 ‘부럽지가 않아’를 비롯해 ‘뭘 잘못한 걸까요’ ‘얼마나 가겠어’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등 수록곡 제목만 보더라도 디딜 땅을 잃은 채 둥둥 뜬 그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직접 앨범을 들어보면 ‘공중부양’이라는 앨범명이 더 이해된다. 다섯 곡 모두 베이스가 없다. 악기 편성이 거의 없이 목소리로만 이루어지고, 보컬과 랩의 경계에서 말하는 듯한 그의 독특한 창법은 더 돋보인다.
“베이스가 없다는 건 사실 만들고 알았어요. ‘붕 뜬 거 같은데 뭐지?’ 싶어서 가만히 생각했더니 베이스가 없더라고요. 덩그러니 있는 목소리가 외롭지 않을 만큼만 소리를 붙여나가다 보니 ‘이만하면 됐네’ 하는 생각이었죠. 베이스를 넣고 안 넣고 의식조차 없는 과정이었어요. 저도 만들어놓고 신기했어요.”
“저의 정체성은 목소리이니까 먼저 목소리를 녹음하자고 했었거든요. 편곡이 거의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반주로 녹음한 것들이 많았죠. 대중가요로서 인식이 된다는 조건만 맞으면 어떤 소리든 상관없다는 식이었어요. 록(Rock)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는 건 장기하와 얼굴들 때와는 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앨범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스스로를 환기하는 시간 덕분이었다. 장기하와 얼굴들 해체 후 2년 동안그는 일부러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작업을 하려고 자리에 앉아봐도 자신도 모르게 6인조 편성을 깔아두고 한다든지,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과 비슷한 것들만 나왔기 때문이다. 어쭙잖게 밴드 때랑 비슷하게 할 것 같으면 바로 앨범을 내는 게 의미 없다는 생각에 손을 놨다.
“확실하게 방향을 설정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론이 난 순간이 지난해 초 정도였죠. 그때부터 앨범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5곡 정도는 1년 안에 나올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저의 오산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발매 계획이 틀어졌고요. 발매 전까지 떨리고, 기대도 되고, 어떻게 들어주실지 궁금했는데 재밌게 들었다고 해주신 분들이 많아 안심하고 있습니다.”(웃음)
그는 정식 앨범을 발표하기 전, 앨범을 소개하는 내용의 음원을 냈다. 지난 14일 공개된 이 곡의 제목은 ‘2022년 2월 22일’로, ‘공중부양’ 발표 날짜다. 앨범 수록곡 5곡의 사운드를 편집해 샘플링했고, 다른 요소 없이 그의 목소리만 담겼다.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이 ‘너 이제 음악도 그만뒀는데 이제 뭐 할 거냐?’라고 묻자 ‘나 은퇴한 거 아냐’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신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재치 있다.
“가수 활동 시작할 때부터 ‘말과 노래의 관계라는 건 무엇일까’라는 일관된 생각을 해왔어요. 그 결과, ‘말은 원래 거의 노래에 가깝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됐죠. 따로 노래를 만들 필요가 없이 평소에 하는 말에 음악이 다 있다는 생각이었어요. 이런 결론을 내는 데 오래 걸렸죠. 지난해에 앨범을 발표했다면 이런 곡은 발표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준비가 돼있는 상태에서 회사 분들과 회의를 하는데 ‘곡을 설명하는 음성메시지 같은 것을 내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아예 노래로 내겠다고 했고요.”
옆에서 장기하의 말을 듣고 있던 제작자는 “발매 전에 인스타그램(SNS) 콘텐츠로 올릴 목소리 정도만 녹음해달라고 했는데 곡을 만들어 주더라”고 덧붙였다. 이에 장기하는 “목소리를 늘린 것 같아 개인적으로 뿌듯하다”며 웃어 보였다.
타이틀곡 ‘부럽지가 않어’는 장기하의 엉뚱함과 기발함이 돋보이는 노래다. 누군가에게 마음껏 자랑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전혀 부럽지 않다고 반복하는 것이 웃음을 자아낸다.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두고 만든 건 아니고,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삭제된 가상의 인물이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작업했다고. 이 때문에 듣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진짜 부럽지 않아서 부럽지 않다는 것인지, 사실은 부럽다는 이야기인지’로 의미가 다르게 느껴질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힙합 음악 몇 곡을 듣다 보니 자랑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게 힙합의 문화이니까 재밌게 듣고 있었는데 ‘그러면 자랑 중에 모든 자랑을 다 이기는 건 무엇일까?’라고 생각했었죠. 돈, 실력, 성공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모든 자랑이 전혀 부럽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여겼고요. 내적으로 이겨보려고 만든 곡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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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는 노래만큼이나 독특하다. 검은 배경화면에서 슈트를 입고 등장한 장기하가 빙글빙글 돌아다니고 손 모양이 떠다닌다. 몸은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눈은 부러운 대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장기하의 몸이 못에 박힌 것처럼 고정되어 있는 부분이 눈이다.
“웹 아티스트 송예환 작가님께서 연출해 줬는데, 회의할 때 제가 드린 말씀은 ‘일반적으로 부럽지 않다고 하는 가사이지만 세상에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사람이 있겠나. 그렇게 말해도 속으로 그렇지 않은 그런 상황이 연상된다’는 거였어요. 그런 걸 표현해달라고 했었죠.”
6분 분량의 4번 트랙 ‘가만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도 꽤나 실험적이다. 소리꾼 이자람의 ‘심청가’가 등장해 장기하의 목소리와 조화롭지 않은 듯 조화롭게 어우러져 신선하게 느껴진다. 장기하도 처음 만들어 본 스타일이라며 “짧은 길이는 어울리지 않더라. 조금 여유를 갖고 충분히 반복되다가 이어지는 게 이 장르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자람 소리꾼이 고등학교 때 ‘심청가’를 완창해서 녹음한 4CD 세트가 있거든요. 자랑인데 이건 디지털로 들을 수 없는 레어템(rare item)이에요. 이자람 누나와는 대학 시절부터 지인인데 그때 그는 이미 명창이었고 전 무언가를 해보려고 시작하는 단계였어요. 제가 자작곡을 들려주면 재밌다고 해주더라고요. 군대 갔을 때 그 판소리 CD를 보내줘서 닳도록 들었어요. 판소리가 엄청난 장르라는 걸 그때 알았고, 대중음악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우리말의 확장성이 크다고 느꼈죠. 제가 음악 하는데 영향이 컸던 음악이라 언젠가 오마주 해보고 싶었어요. 이 음악에 샘플링하면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허락받고 사용하게 됐어요.”
앨범은 전반적으로 신선함과 재미가 깔려있지만, 혼란스러운 그의 감정도 섞여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 해체 후 방황과 혼란을 겪었다는 그는 “한참 활동할 때는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장기하와 얼굴들을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게 밴드였다”며 “밴드를 마무리하는 게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겐 큰일이었다. (해체 후) 인생의 계획이 상당히 많이 바뀌었는데 단순히 직업보다 ‘어디를 보고 살아야 하나’ 생각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장기하와 얼굴들을 그 시기에 마무리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렇게 마무리해서 이런 형태의 앨범도 낼 수 있었다”고 되돌아봤다.
앨범의 퀄리티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발표하지 않는 그에게 이번 앨범은 완성도 높은 앨범이다. 그는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만족도를 표현해 웃음을 자아냈다.
“늘 똑같아요. ‘개쩐다’는 생각입니다. 장기하와 얼굴들 1~5집도 다 마찬가지였고요. 그런 생각이 안 들면 완성을 안 하기 때문이죠. 물론 완성 직후의 생각이고 다음 날의 생각은 달라요.”(웃음)
“마흔 살이 된 ‘나’라는 음악인의 좌표 같은 앨범이에요.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보겠다는 거죠. 전 이제 ‘누구처럼 되고 싶어요’라는 게 없거든요. 예전에는 배철수, 김창완 선배님처럼 되고 싶었는데 누구처럼 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도 않고, 시대와 여러가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내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40대 이후에는 롤 모델 없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장기하의 음악을 기다린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음 앨범의 공백기도 길어질까 걱정하는 팬들도 있다. 이에 그는 “다음 앨범도 이렇게 텀이 길면 먹고살기 힘들 듯하다”고 너스레를 떨며 더 이상의 긴 공백기는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제 자신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거예요. 빨리빨리 또 뭘 하고 싶거든요. 장기하와 얼굴들 때는 싱글이라는 걸 거의 안 냈는데 이제 싱글도 내보고 싶어요. 이번 음반은 저 혼자 만들었지만 이걸로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제가 이 정도의 좌표를 찍었다고 알리고, 다양하게 협업해서 너무 무겁지 않게 한 곡씩 딱딱딱딱 내고 싶은 생각이에요.”(웃음)
활동 모터를 달면서 내달 단독 공연까지 준비하고 있다. 3월 17~20일, 24~27일 공연 날짜도 여러 번이다. 그는 앨범과 마찬가지로 공연도 과거의 연장선이 아닌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작업이라며 “장기하와 얼굴들 때의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안 할 것이다. 이번 앨범 음악 위주로 채우고 밴드 편성의 연주도 안 할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것들로 무대를 채우겠다”는 그는 안무가 윤대륜, DJ 디구루, 무대미술가 여신동과 함께 ‘뭔가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즐겁게 작업하고 있는 중이라고.
“초심으로 돌아간 것도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거든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싸구려 커피’ 때 갖고 있던 정체성만 남았고요. 그런 것처럼 어떻게 하다보니 어느 날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거울을 보니 ‘싸구려 커피’ 때 장기하가 있더라고요. ‘마흔을 앞둔 내가 어려보이려 노력하지 않고 내 발로 당당하게 40대에 걸어 들어가겠다’는 의지였는데, 며칠 전에 40대에 들어갔으니 수염을 잘라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웃음)
“20년 전부터 저는 부러운 것도 너무 많고 욕심도 많아서 ‘버려야지’ 하는 방향으로 살고 있어요. 아직도 버리지 못해 그 방향을 바라보며 살고 싶고요. 웬만하면 가만히 있고 싶고, 의미 없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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