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러시아 대선 당시를 돌아보면 기상천외한 ‘권력 회전문’을 목도하게 된다. 러시아 국영 가스 기업인 가스프롬의 회장이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블라디미르 푸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다. 그 대신 푸틴은 빅토르 줍코프가 맡던 총리직을 넘겨받고 줍코프는 가스프롬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2012년에 대통령직에 다시 오른 푸틴에 의한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로 다시는 똑같은 회전문을 보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메드베데프와 줍코프는 각각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가스프롬 회장으로 푸틴을 보좌하며 트라이앵글의 두 축을 맡고 있다.
가스프롬은 푸틴의 최대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20%를 보유한 가스프롬을 통해 유럽과 동북아시아에 가스를 독점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외교적 레버리지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가스 수출로 얻은 막대한 재정 수입은 푸틴의 정치 권력을 유지하는 든든한 밑천이다. 가스프롬은 1989년 당시 가스산업부 장관이었던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이 출범시켰다. 그는 1992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발탁됐고 1998년 가스프롬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러시아 대통령과 가스프롬의 부적절한 정경 유착은 이처럼 뿌리가 깊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푸틴의 심장 격인 가스프롬을 직격했다. 그는 23일 “나는 오늘 ‘노르트 스트림2 AG’와 그 기업 임원들에 대해 제재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노르트 스트림2 AG는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인 ‘노르트 스트림2’ 건설을 주관한 기업인데 가스프롬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일본 등도 러시아 제재 강화에 적극 나섰다. EU는 이날 러시아 국방장관과 푸틴 대통령의 비서실장, 하원의원 등의 자산을 동결하고 이들의 EU 국가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켜보다가 상황이 전면전으로 치닫고 나서야 뒤늦게 제재 동참 의사를 밝혔다. 인류가 공분해야 할 침략 행위에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들이 제재에 나서는데 한국만 보이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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