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세계경제에서 빠르게 고립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각국은 러시아와의 거래 차단 및 자산동결 등 연일 대러 경제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으며 그간 러시아 기업들과 긴밀히 협력해온 글로벌 기업들도 속속 러시아에서 발을 빼고 있다. 연기금 등 큰손들도 러시아 자산을 팔아치우고 있다. 러시아와의 ‘단절’이 전방위로 확산되면서 러시아 경제가 휘청이자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시장에서도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고 비트코인 가격이 15%가량 급등하는 등 우크라이나 사태의 파장이 날로 커지고 있다.
2월 28일(현지 시간) 뉴욕타임스(NYT)는 유럽 최대 석유 회사인 영국의 셸이 러시아 국영 가스 업체인 가스프롬과의 합작 사업 중단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셸은 러시아와 공동으로 추진해온 프로젝트를 전면 중단하고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 재정 지원도 철회하기로 했다. 앞서 영국의 또 다른 에너지 대기업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이 러시아 국영 로스네프트의 보유 지분 19.75%를 전량 매각한다고 밝힌 지 하루 만에 나온 행보다.
제너럴모터스(GM)와 볼보·폭스바겐 등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 역시 일제히 러시아 수출을 일시 중단했다. 이들 기업은 유럽연합(EU)과 미국의 제재 방침 등이 보다 명확해지면 수출 재개를 검토할 예정이다. 프랑스 르노자동차 또한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의 공장 가동을 멈췄다.
글로벌 자금 시장의 큰손인 연기금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세계 최대 자산을 보유한 노르웨이 국부 펀드가 러시아 제재 조치의 일환으로 지난해 말 기준 250억 크로네(약 3조 4000억 원)에 달하는 러시아 자산을 처분하기로 했다. 여기에 러시아 증시가 ‘투자 불가(uninvestable)’ 상태에 빠지자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지수는 러시아를 퇴출시키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각국 정부의 제재 수위 역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 중앙은행과의 달러 거래를 금지하고 국부 펀드의 직접 투자를 전면 차단하는 등 추가 금융 제재를 발표했다. 이에 발맞춰 1일 일본 정부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6명의 자산동결과 러시아 중앙은행 등 3개 은행의 거래 제한 조치를 발표했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에서는 싱가포르가 처음으로 러시아 제재 카드를 꺼내 들었고 중립국인 스위스도 푸틴 대통령과 측근들의 자산을 동결하며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
서방의 전방위 경제제재에 푸틴 대통령도 고강도 금융 통제로 맞대응하고 있다. 크렘린궁은 2월 28일 푸틴 대통령이 국외 외화 송금 금지와 무역 업자에 대한 외화 수입 강제 매각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 경제 조치 적용에 관한 대통령령을 발령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일부터 러시아 거주자들은 국외로 외화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해외은행에 개설된 본인의 계좌로 외화를 송금할 수도 없다. 계좌 개설 없이 전자 결제 수단을 이용해 자금을 이전하는 것도 차단된다. 또 무역 업자들은 올해 1월부터 해외에서 확보한 외화 수입의 80%를 사흘 안에 매각해야 한다. 루블화 가치가 올해 들어 3분의 1 토막이 나는 등 사상 최저 수준으로 하락하면서 러시아 내 뱅크런 사태가 우려되는 가운데 나온 조치다. 외국인 투자자의 러시아 내 자산 회수도 제한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는 1일 정부 회의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일시적인 제재를 가할 것이라며 “현재 제재 상황에서 외국 기업가들이 경제적 요인이 아닌 정치적 압력에 의해 결정을 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다만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같은 통제에도 러시아 경제의 타격을 막아내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로이터통신은 국제금융협회(IIF)에서 올해 러시아 경제가 두 자릿수로 위축될 수 있으며 루블화 가치 폭락으로 달러 유동성이 급격히 줄어들어 약 600억 달러 규모의 달러 발행 채권에 대한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고강도의 자본 통제 조치에도 이미 러시아 금융 시스템의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서방의 에너지 제재 등이 현실화할 경우 러시아 경제 붕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의 디폴트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러시아 국채 가격이 50%나 폭락하는 등 시장 불안도 극심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어드밴티지데이터를 인용해 2월 27일 70센트에 거래되던 2047년 만기 달러 표시 러시아 국채 가격이 28일 30센트로 급락했다고 보도했다. 2월 초 1.08달러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한 달 사이 70% 이상 급락한 셈이다.
러시아 경제가 전방위 위기에 직면하자 러시아인들도 앞다퉈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루블화가 30% 가까이 폭락하자 러시아인들이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대거 구입하면서 2월 28일 현재 비트코인 가격은 15%가량 급등했다. 달러 등 현금을 미리 확보하기 위한 수요가 크게 늘면서 러시아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는 큰 혼잡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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