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A 사의 미국 워싱턴DC 사무소가 28일 오후(현지 시간) 변호사들을 긴급 소집해 미국의 대러 수출 통제 핵심인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에 대한 분석에 돌입했다. 80쪽에 달하는 이 규칙은 미 상무부 전 당국자가 “지금까지 작성된 것 중 가장 복잡한 수출 통제 규칙”이라고 할 정도로 난수표에 가깝다. 미국이 통제하는 품목을 러시아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부품 하나하나 미국 기술의 적용 여부를 따지고 증명해야 한다. 워싱턴의 한 기업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이 최근 수년간 미국에 투자한 게 얼마인데 막상 이런 일이 터지면 예외 규정 적용 하나를 받지 못하느냐”고 한탄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속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한국의 입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한국의 소심하고 미온적인 접근은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고 또 어리석은 것이다(마크 피츠패트릭 전 국무부 차관보)” “과거에도 한국은 고개만 숙이고 자체 경제적 이익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스콧 스나이더 미 외교협회 미한정책국장)” 등의 반응이 워싱턴 조야에서 나올 정도다.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와 보폭을 맞추지 못하고 대러 제재에 늦게 동참한 탓에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것은 국내 기업들이다. 미국은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침공의 책임을 묻기 위해 수출 통제 조치를 단행하면서 독자 대러 제재를 발표한 유럽연합(EU)과 일본·호주·영국·캐나다·뉴질랜드 등 32개 핵심 동맹국에는 FDPR 예외 규정을 적용했다. 대러 수출 시 미국 상무부 산업안전국(BIS)의 심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 미국의 동맹끼리는 서로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이 명단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독자 제재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한국은 미국의 수출 통제 대상 기술을 사용한 제품을 수출할 때 일일이 미국 허가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우리 정부가 뒤늦게 제재에 동참한다고 발표했으나 이미 기업들에는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의 피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미국과 국제사회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국제사회의 보편적 상식으로는 묵과할 수 없는 잔혹한 침략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아시아를 대표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워싱턴 안팎에서 나온다. 지난달 28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EU와 일본·캐나다 등 동맹국과 러시아 핵 위협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80여 분 동안 진행한 긴급 통화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동맹국과의 밀착 행보를 강조하는 바이든 정부가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24일 한국 외교부가 ‘대러 독자 제재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은 것을 두고도 “도대체 저런 불필요한 발언을 왜 하느냐”는 반응이 쏟아졌다. 결국 한국 정부는 불필요한 공언으로 스스로 외교적 입지를 좁히고 국제사회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끝에야 뒤늦게 대러 제재에 동참함으로써 명분도 실리도 챙기지 못하는 셈이 됐다.
한국 정부는 국익을 위해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다고 해명하지만 유럽에서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은 독일의 최근 행보만 봐도 이번 사태를 대하는 외교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전까지만 해도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했으나 러시아의 침공 시점을 계기로 완전히 정책을 틀어 이제 반(反)러시아의 선봉에 섰다. 천연가스의 5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데도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 사업을 중단시켰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을 방어하겠다며 미국 전투기를 구매하는 등 국방비를 대거 증액하기로 했다. 탈냉전 시대 이후 유지해온 독일의 소극적 안보 정책의 궤도 수정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의 날인 2월 24일은 역사의 전환점이 됐다”고 밝혔다. 국제사회의 조류를 읽어내는 강대국 독일의 노련한 외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최근 세계은행 홈페이지 직원 게시판에서는 한 우크라이나 국적 직원이 현지 가족을 걱정하는 글을 올리자 이웃 국가인 폴란드인 직원이 “가족들을 위한 피난처로 우리 집을 제공하겠다”고 화답해 눈길을 끌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 앞에 국제사회가 하나로 뭉쳐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수많은 국가의 도움을 받아 성장한 한국이 우크라이나 위기 앞에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어떻게 비칠지 우리 정부는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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