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음을 다해 연기했다. 여느 때보다도 작품의 무게가 무거워 책임감이 느껴졌다. 캐릭터에 본인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을 철저하게 견제하며, 오롯이 작품의 메시지에 부합하는 캐릭터로 보이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소년심판’의 심은석이 탄생했고, 소년범 문제에 경종을 울렸다.
지난달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심판’(극본 김민석/연출 홍종찬)은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소년법 폐지론과 촉법소년 논란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작품이다. 소년범을 혐오하는 판사 심은석(김혜수)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신념을 가진 판사들을 조명하고, 소년 범죄가 왜 일어나고 어떻게 악순환되는지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신선한 충격을 줬다.
‘소년심판’이 유의미한 작품이라는 평가받는 건 소년 범죄를 극적인 재미를 위한 장치로 사용한 게 아닌, 다각적으로 생각의 장을 넓혀준 덕분이다. 김혜수도 그런 이유로 ‘소년심판’을 선택했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있고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여서 반가웠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대본을 써 내려간 김민석 작가의 의지가 인상 깊었다.
“감독님뿐만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주력하려고 노력했어요. 소년 범죄에 대한 문제를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에 통용되잖아요. 우리가 함께 고민을 해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은석을 연기하기 위해선 ‘절대로 이 작품의 메시지에 부합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소년범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센 어조로 말하는 심은석을 단지 강한 캐릭터로만 그리면 안 된다고 여겼다. 법관으로서, 사회의 어른으로서 갖고 있는 신념, 그 신념을 바탕으로 소년범이나 피해자 가족, 가해자 가족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법관들 사이에서 신념에 관한 이해 충돌 등이 모두 중요했다.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제 법관들을 만나고 소년 법정을 참관하면서 느꼈던 게 작품 속 네 명의 판사들이 하는 얘기가 실제 그 법관들이 하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래서 김민석 작가님이 얼마나 오랜 취재 끝에 가해자와 피해자, 법관 등 굉장히 다각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균형감 있게 접근했는지 더 많이 느꼈습니다.”
“대본을 보면서 가장 좋았던 점 중에 하나는 말에 기교가 없다는 거였어요. 묵직하게 그 대사의 힘, 메시지가 바로 다이렉트로 전해지더라고요. 저는 그 점이 정말 좋았고 그 점을 반드시 제가 느낀 대로 전달하고 싶었어요. 실제 심은석이 틀린 말을 하지 않잖아요. 근데 그게 단지 주인공이니까 ‘멋지다. 참 이상적인 말을 하네’로 그치지 않는다는 게 이 작품의 포인트이고 심은석의 역할이었던 것 같아요.”
김혜수는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라는 강렬한 대사로 시작하는 심은석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많이 돌아봤다. 평소 사회면에서 소년범 이슈를 접하며 충격받고 분노했던 것, 그러면서 소년 범죄 자체를 혐오하고 비판했던 것이 계속 떠올랐다. 극단적이었던 심은석이 어른들의 관심으로 변화하기도 하고, 어른들의 방치 속에서 그릇된 선택을 하는 소년범들을 발견하면서 점차 변했던 것처럼 그의 좁았던 시야도 넓어졌다.
“심은석은 실제 범죄 피해 가족임과 동시에 법관이잖아요. 소년범과 소년범죄를 혐오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미에 가면 단지 이게 개인의 상처 때문이 아니라 법관으로서, 한 사회 구성원의 어른으로서 범죄는 혐오하되 거기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단지 장치적으로 인간 심은석을 이해한다는 걸 넘어서 실제 이 작품이 갖는 주제와 굉장히 맞닿아 있다는 식으로 접근했어요.”
심은석은 억울하게 피해 입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피해자를 명명백백하게 가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심은석의 신념이 잘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는 재판장에서 항상 눈앞에 피해자의 사진을 두는 습관이다. 이런 설정은 김혜수가 직접 홍 감독에게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심은석이 소년 범죄 사건을 들여다볼 때 대사로도 있잖아요. ‘오늘 판결을 통해서 피해자는 억울함이 해소됐는가. 가해자는 반성하는가’ 이런 얘기요. 그 대사로 그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감독님이 제 마음처럼 화면에 잘 담아주셨어요.”
굳센 신념의 심은석을 표현하는 건 대본을 충실하게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그럴수록 현장에 가는 차 안에서도, 현장에서 준비할 때, 현장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리고 잠들기 직전까지도 심은석을 놓고 싶지 않고 놓아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다른 캐릭터의 감정에 동화될 때 심은석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초반에 가정폭력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소년범 전력이 있는 비행 소년인 서유리 사건에 대해서 차태주 판사가 문제 제기를 하죠. ‘소년부 판사가 어떻게 이렇게 미움과 분노로 소년범을 대하냐’고 하는데 그게 따뜻한 시선으로 보라는 얘기가 아니거든요. 근데 심은석은 ‘그 나이에 감히 범죄를 저질렀으니까’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장면 리허설을 하는데 차태주 판사를 연기하는 김무열의 감정에 너무 동화가 되는 거예요. 심은석은 그런 것들을 외적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되는 캐릭터이니까 제가 감독님과 김무열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리허설하지 말고 그냥 촬영을 해야 되겠다’고 양해를 구했어요. 그렇게 리허설을 중단하고 촬영을 했던 적이 있죠.”
관련기사
“법관으로서 피해자 가족을 대면하는 장면에서도 피해자 가족을 연기하셨던 분들이 정말 집중해서 절절하게 연기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때 흔들림 없는 냉정함을 연기해야 하는 게 사실 쉽지 않았아요. 너무 가슴이 아팠는데 심은석이 피해자 가족을 가족에게 이입하는 방식은 앞에서 함께 울어주고 위로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스탠스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김혜수에게 소년범 역할을 한 배우들에 대해 물으니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며 칭찬을 쏟아냈다. 그는 작업 전 에피소드별 사건을 보면서 ‘진짜 이건 잠깐 나오지만 너무 어렵겠다’고 생각하는 배역도 있었고, ‘이거 잘해줘야 되는데. 이거 잘못하면 자칫’이라고 걱정하기도 했었다고. 그러나 걱정도 잠시 소년범 에피소드를 거듭할수록 캐스팅 면면에 놀라웠다고 강조했다. 홍 감독이 엄청난 시간을 할애하며 오디션을 거듭했고, 적역을 찾아내 지금의 ‘소년심판’이 완성된 것이었다.
“보시는 분들 아시겠지만 판사 역과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면 범죄 관련 소년범 혹은 피해자, 피해자 가족, 가해자 가족 대부분 많이 노출되지 않았지만 굉장히 실력이 갖춰진 배우들이에요. 덕분에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마치 진짜 사건을 접하는 것 같은 느낌이 최대한 살았던 것 같아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배역들을 배치하신 감독님의 노력에 정말 감사드려요.”
김혜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배우는 첫 번째 초등생 살인사건 에피소드 속 백성우 역의 배우 이연과 한예은 역의 황현정이다. 이연은 극중 중학생 소년을 연기했지만, 실제로는 올해 28세가 된 여자 배우다. 황현정은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19세 어린 연기자다.
“처음 이연을 만난 게 의상 피팅 할 때였거든요. 처음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한 번도 대본을 보면서 백성우를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릴 수가 없었는데 백승우가 그냥 거기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연을 보는 순간 막 심장이 막 쿵쾅쿵쾅거리는 거예요.”
“황현정 같은 경우는 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 굉장히 이성적으로 접근을 했어요. 실제 이 사건과 유사한 케이스의 해외 논문까지 번역해서 다 보고 왔더라고요. 연기할 때 깜짝 놀랐거든요. 새로운 얼굴인데 이 캐릭터의 본질에 가깝게 연기했어요. 작품 하는 동안에 그냥 그 인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에게는 ‘꽃잎’이라는 작품의 배우 이정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조금 있었어요.”
대단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었던 건 좋은 경험이었다. 이성민(강원중 역), 이정은(나근희 역)을 향한 존경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고, 김무열과 염혜란(오선자 역)을 통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김혜수는 “대사에 쓰이는 것과 이 대사를 통해서 이 감정을 구현하는 그 배우의 진심이 그냥 가슴으로 툭툭 와닿더라”며 감탄했다.
“실제 이정은 씨는 같은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참 포근하고 어른스러워요. 어른스러운 척하지 않아요. 그냥 어른스러운 거죠. 배우로도 너무 훌륭하고요. ‘소년심판’의 나근희는 실제 이정은이라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대본을 봤을 때 예상할 수 있는 나근희와 전혀 다른 현실적인 인물을 구현했죠. 그래서 ‘역시’라는 생각을 했고요. 이정은 씨가 이 작품을 다 보고 나서 저한테 문자가 왔어요. 작품 보면서 참 많이 반성했대요. 그 진심이 뭔지 너무 느껴지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연기라는 작업을 진중하고 겸손하게 대하는지가 느껴져서 그런 동료를 만났다는 게 참 좋았어요.”(웃음)
좋은 연기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상대 배우들 덕분이었다. ‘보여줘야죠. 법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야죠. 사람을 해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라는 명대사를 남긴 강원중과 심은석의 대립 신 또한 그냥 탄생한 것이 아니다. 다른 회차 촬영을 하고 있던 중에도 해당 신은 김혜수의 마음속 어딘가를 붙잡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심은석과 일치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남았기 때문이다.
“제가 이성민 선배님, 김무열, 감독님께 양해를 구하고 재촬영을 요청했어요. 그때 가장 죄송했던 분이 이성민 선배님이었죠.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대사들이 많았고, 사실 저는 재촬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선배님의 연기는 이미 정말 충분했거든요. 그래서 참 그 말씀을 드리기 죄송스럽고 조심스러웠는데, 그때 선배님이 ‘얼마든지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저를 응원해 주셨어요. 그 연기를 다시 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이성민 선배님이었어요.”
모든 작품의 준비 과정과 촬영 과정을 통해 얻는 게 있지만, ‘소년심판’은 모든 방향이 명확했기에 김혜수의 삶 속에 직접적으로 스며들었다. 소년범죄가 소년범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회와 어른들의 무관심에도 원인이 있다는 것은 큰 깨달음이었다. 또 잠깐의 관심에서 끝나는 게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른으로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기 위해 노력과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가슴속 깊이 박혔다.
“법정이라는 건 저에게도 사실은 굉장히 낯선 세계이고, 제 삶하고는 굉장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간이죠. 근데 이전부터 사실 사회면에서 조금 관심이 가는 사안들이 있으면 실제 법정 참관 신청 같은 것도 했던 적도 있거든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보다 더 집중적으로 소년 법정을 경험을 하게 되면서 깨달은 건 ‘내가 그동안 사회 문제에 관심 갖는 척을 하지 않았나’ 싶은 거예요. 관심의 범위 같은 것들이 얼마나 편협했는지에 대해 많이 느꼈어요. 제가 관심이라고 착각했던 것들은 어찌 보면 사회 현상에 대한 분노나 안타까움 슬픔을 표현하는 굉장히 감정적인 태도에 좀 머물렀던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