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보다 중요한 건 답을 찾는 과정이야.”
지난 9일 개봉한 한국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이 고등학생 ‘수포자’ 한지우(김동휘)를 만나 한 말이다. 그저 빨리 풀고 싶어 공식 한 줄 외워 대입시키다 보니 문제가 틀린 줄도 몰랐던 지우에게, 이학성이 건넨 조언이었다. 빠르게, 빠르게 결과 만을 향해 달리기 쉬운 우리 사회에 묻는 커다란 질문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 최민식 배우 특유 온화한 모습이 반갑기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개봉 직후 대형 할리우드 영화 ‘더 배트맨’을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정체를 숨긴 고등학교 경비원으로 분했던 배우 최민식. 그가 20년 전 쯤 ‘이상한 동네의 음악쌤’으로 출연했던 영화가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감독 곁에서 조연출을 했던 류장하 감독 첫 작품 ‘꽃피는 봄이 오면(2004)’이다. 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에 더해 요즘 대세 배우들의 반가운 청춘 시절까지 엿볼 수 있는 명작이다.
배경은 겨울이다. 어느 겨울, 최민식은 누구보다 추운 계절을 맞는다. 그는 음대에서 트럼펫을 전공한 현우였다. 자존심은 있어서 ‘딴따라’처럼 밤무대 서는 건 극도로 싫어하는 인물. 음악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조차 도무지 면이 안 섰던 그는 사랑했던 연희(김호정)와도 오래 전에 헤어졌다.
그는 교향악단에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해마다 오디션을 본다. “작년에도 오셨지 않느냐”는 심사위원 핀잔을 듣지만 내년에 또 도전할 기세다. 그에게 꿈이란 명확한 목표였다. 현실의 벽에 매번 부딪치지만 언젠가는 벽을 무너뜨리고 넘어설 실체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벽은 점점 높아진다. 아니, 아예 만져지지도 않는다.
마침 들려온 연희의 결혼 소식에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고. 그는 강원도 탄광촌 작은 중학교의 관악부 임시 교사가 돼 서울을 떠난다. 낡은 악기들과 찢어진 악보. 색바랜 트로피와 상장 몇 개만 있는 그곳에는 곧 강제 해산을 앞둔 관악부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꿈 만은 바래지 않은 아이들, 재일(이재응)과 용석(김동영)이 있었다. “넌 음악을 왜 하냐?”, “케니 지처럼 되고 싶어서요(용석).”
하지만 꿈을 짓밟는 교사(엄효섭)와 아버지(최일화)가 있었다. 탄가루 마셔가며 자식을 키우니, 자식만큼은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심정으로. 아이들에게 자신을 투영해보던 선생 현우는 문득 엄마(윤여정)에게 묻는다. 엄마는 꿈이 뭐였었느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꿈을 계속 지키기에도, 현실과 타협 하기에도 애매한 나이인 현우에게 엄마는 되묻는다. “넌 지금이 처음이야, 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정답을 알려주는 영화가 아니었다. 답을 찾는 과정만을 잔잔히 들여다본다. 그곳엔 전국대회 우승 아니면 해체라는 관악부의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꽃피는 봄이 오면’의 서사에서 그 목표는 중요치 않았다. 영화 속엔 성공도, 실패도 없다.
단지 따뜻한 과정들이 정성스럽게 그린 수채화처럼 한 장면, 한 장면 이어진다. 현우가 지나가며 들리던 마을 약사 수연(장신영)은 현우 마음에 조심스럽게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게 남녀 간 사랑이었는지, 정이었는지 그 또한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자체만으로 설랬다. 위로가 됐다.
새해맞이 떡국을 차려주던 떡장수 할머니(김영옥), 오해가 조금 있긴 했지만 공짜로 차를 고쳐주던 정비소 직원 주호(김강우) 그리고 먼 길을 찾아와 술잔 기울이며 연희의 근황을 슬쩍 들려주던 친구 경수(장현성)까지. 추운 계절이었지만 이런 따뜻한 마음들 덕분에, 어느덧 현우 마음에도 꽃피는 봄이 찾아온다.
3월, 사랑하기에도 꿈을 꾸기에도 적당한 계절이다. 사랑하는 이, 꿈꾸는 이가 청년이라고 누가 말했던 것 같다. 현우의 ‘벚꽃엔딩’처럼 우리 마음에도 봄꽃이 활짝 피어나기를. 영화 속 감동적인 교향곡처럼 멋진 합주를 만들어내기를.
◆시식평 :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최민식은 역시다.
관련기사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