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곡창지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한 가운데 러시아 정부가 자국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주변국으로의 주요 곡물 및 설탕 수출을 금지하고 나섰다. 자국 식량난에 대응하기 위한 각국의 농산물 수출 금지 조치가 잇따르는 가운데 미국 내 최대 밀 생산지인 캔자스주의 가뭄 등 기후위기까지 겹치면서 전 세계가 식량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4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옛소련 국가들에 대해 주요 곡물 및 설탕 수출을 잠정 금지한다고 밝혔다.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는 이날 백설탕과 원당 수출을 오는 8월 31일까지, 밀·호밀·보리·옥수수 수출은 6월 30일까지 각각 금지하는 내용의 명령에 서명했다. 이번 조치는 옛소련 국가인 카자흐스탄·벨라루스·아르메니아·키르기스스탄 등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국가들에 적용된다. 러시아 정부는 성명에서 "외부의 통제에 직면한 상황 가운데 국내 식품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의 이번 조치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전 세계적 식량 부족의 단면이다. 지난 2020년 현재 3730만 톤을 수출하는 세계 1위 밀 수출국 러시아와 세계 5위 밀 생산국 우크라이나가 농작물 생산에 타격을 받으면서 밀과 옥수수 등 곡물 가격은 한 달 새 큰 폭으로 뛰었다. 지난달 초 시카고상품거래소(CBT)에서 부셸당 7.74달러였던 밀 선물 가격은 한 달여 만에 67%나 급등해 7일 12.94달러로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옥수수 가격도 지난달 초 6.34달러에서 11일 7.63달러로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이처럼 농작물 수급이 악화하면서 식량난 우려가 커지자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터키·이집트·헝가리 등도 밀 등 곡물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했지만 곡물 가격은 여전히 안정세를 찾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의 이번 조치는 국세 시장에서의 곡물 가격 상승을 더욱 부추길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는 국내 시장 및 공급량 보호를 위해 EAEU 이외 국가에 대해 수출할당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이번에 EAEU 국가들에까지 수출 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시장 불안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다만 빅토리아 아브람첸코 러시아 부총리는 "개별 허가증에 따라 쿼터 내 곡물 수출은 계속 허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후위기도 식량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먼저 미국의 가뭄이 우려되는 요인이다. 미 국립가뭄경감센터는 8일 기준 미 캔자스주의 절반 이상에서 심각한 가뭄이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캔자스주는 미국 내 최대 밀 생산지다. 로이터통신은 캔자스와 노스다코타에 이어 미국 3위 밀 생산 지역인 오클라호마주 역시 총면적의 4분의 3이 심각한 가뭄으로 분류된다고 전했다. 세계 최대 곡물 생산국 중 하나인 캐나다 역시 가뭄과 폭염을 겪으면서 파스타 제조에 사용되는 듀럼밀 가격이 지난 1년간 2배가량 오른 상태다.
전문가들은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출하량 제한으로 곡물 가격이 더욱 올라 전 세계가 식량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식량 가격이 이미 급등한 마당에 전쟁까지 덮쳐 세계 식량 시스템이 재앙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길버트 호웅보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총재는 "우크라이나 분쟁이 길어지면 밀과 옥수수 등 세계 주요 작물의 공급이 제한돼 식량 가격이 급등하고 기아도 급증할 수 있다"며 "이는 식량 안보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막시모 토레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수석이코노미스트도 가디언에 "러시아 갈등이 빨리 해결된다고 해도 당분간은 충격이 이어질 것"이라며 "최근의 비료 가격 급등에 따른 수확량 감소 문제는 내년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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