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에 오른 23일(현지 시간) 미국 정부가 352개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 예외 조치를 부활시켰다. 중국의 러시아 지원을 만류하기 위해 제시한 당근책이다. 동시에 미국은 이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쟁범죄’로 공식화하며 러시아를 압박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이날 관세가 적용되는 중국산 제품 549개 중 352개 품목에 관세 부과 예외를 다시 적용한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중국산 수산물을 비롯해 화학·섬유·전자 및 소비재 등이 포함돼 있다.
이번 조치 대상은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에서 풀지 않고 남은 관세 대상 품목 중 일부다. 앞서 트럼프 전 행정부는 2018년 2200여 개에 달하는 중국산 제품에 무더기 관세를 적용해 미중 무역 분쟁을 일으켰다. 이후 양국은 2020년 말 무역 관계 개선에 합의하며 549개를 제외한 나머지 제품에 관세 예외를 적용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양국은 추가 관세 예외를 논의했으나 관계 악화로 진전되지 않다가 이날 전격적으로 미국의 발표가 이뤄졌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중국이 지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미국이 중국에 러시아 편에 서지 말라는 분명한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미국 수입업자들의 경제적 고통을 완화하는 동시에 미중 관계 내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미국 정부의 노력을 시사한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그러면서도 중국 기업을 향해서는 러시아에 반도체를 팔 경우 아예 문을 닫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지나 러몬드 미 상무장관은 이날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중국 기업들이 러시아에 반도체를 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미국 소프트웨어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그 기업들을 폐쇄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에 대한 전 세계적인 수출 통제, 금융 제재 등의 과정에서 중국이 러시아의 ‘회피처’가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는 특히 중국 최대의 파운드리 업체인 SMIC가 타격받을 가능성을 거론했다.
미국은 중국을 향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꺼낸 반면 러시아를 대상으로는 거센 압박에 나섰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선 유럽 순방 기간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제재안도 내놓는다.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소속 의원 300명 이상을 포함해 러시아 방산 업체 등을 제재 대상에 추가로 올리는 방안이 거론되지만 세부안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
WP는 또 복수의 미 당국자들의 말을 인용해 바이든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2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나 미국산 LNG의 유럽 추가 공급 방안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는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큰 유럽의 에너지 수급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라고 WP는 분석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앞서 EU 의회 연설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만나 앞으로 몇 달간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LNG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지 논의할 것”이라며 “우리는 앞으로 두 번의 겨울 동안 추가 공급을 약속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CNN은 미국 국방부가 바이든 대통령의 유럽 순방에 맞춰 동유럽의 미군 증강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군의 동유럽 추가 파병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대규모 병력 증강과 맞물려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도 앞서 “불가리아·헝가리·루마니아·슬로바키아에 4개의 새로운 전투 병력을 배치하겠다고 선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정부는 러시아가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할 경우 이를 ‘레드라인’으로 보고 군사 개입 등을 고려하는 비상 계획 마련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동안 우크라이나에서 미군이 직접 러시아군과 싸우는 상황에 단호하게 선을 그어왔지만 궁지에 몰린 러시아가 극단적 선택을 할 경우 미국의 군사적 옵션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비상 계획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주도로 구성된 ‘타이거팀(Tiger Team)’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이 숨 가쁜 유럽 순방 일정을 소화하는 사이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러시아의 행위를 전쟁범죄로 공식 규정하고, 국제사법재판소(ICJ) 등을 통한 처벌 추진을 시사했다. 이는 바이든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전범’으로 규정한 것과 연속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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