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순방의 마지막 일정으로 폴란드를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한 공세 수위를 한껏 높인 가운데 그의 바르샤바 연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신중을 기해온 미국 접근 방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러시아의 정권 교체 추구로 해석될 수 있는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을 기점으로 미국과 푸틴 치하의 러시아 간 신냉전 갈등 구도가 한층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거듭되는 러시아의 핵 위협에 맞서는 바이든 정부의 대응 수위도 높아지는 실정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26일(현지 시간) 폴란드 바르샤바 왕궁에서 유럽 순방을 마무리하며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략적 실패’로 규정한 후 “단 1인치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영토로 이동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날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의 회동에서도 나토 조약 5조에 따른 미국의 안보 약속을 거듭 강조했다. 나토 조약 5조는 나토의 설립 근거 조항으로 한 회원국이 공격을 받으면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보고 다른 회원국이 자동 개입해 공동 방어한다는 개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나토 동맹국 간 집단 방위 조항은 신성한 약속”이라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연설에서 러시아가 “국제 질서에 정면 도전”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서방 진영의 고강도 제재로 러시아 경제가 세계 20위 권 밖으로 밀려날 것이라고도 예고했다. 그는 “석유 회사에서 맥도날드에 이르기까지 400여 개 다국적기업이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면서 “경제 수준이 앞으로 몇 년 안에 절반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푸틴 대통령을 ‘전범’ ‘학살자’로 수차례 지칭한 그는 특히 연설 말미에 “이 사람이 권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직격했다. 외신들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부른 이후 러시아에 대한 가장 공격적인 연설”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 연설이 “우크라이나 갈등과 러시아와의 교착 관계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에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며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의 리더십 교체를 시사하면서 의도치 않게 선을 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폴란드 방문 첫째 날인 25일에는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을 1989년 중국 톈안먼 광장 사건에 비유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가까운 폴란드 국경에 배치된 미군을 찾은 자리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전 의지를 칭찬하며 “마치 30세 여성이 탱크 앞에 소총을 듣고 서 있는 것 같다. 나는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를 향해 연일 날을 세우는 가운데 러시아의 핵 위협에 맞서는 미국의 대응 수위도 높아졌다. 전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적대국의 핵 위협에만 핵을 사용하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공약이 폐기됐다고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0년 대선 과정에서 미국의 핵무기를 적대국의 핵 공격 억지나 반격에만 사용하도록 제한하는 핵무기의 ‘단일 목적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공약을 폐기했다는 것은 미국이 ‘극단적 상황’에서 적대국의 생화학 무기나 재래식 무기 등을 억지하기 위해서도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러시아 측은 연일 핵 사용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핵 충돌 위험은 분명히 항상 존재한다"면서 나토의 핵무기가 러시아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핵무기는 유럽과 미국을 겨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고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통신은 전했다. 지난달 27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자국 군대에 핵무기 경계 태세 강화를 명령한 후 몇 시간 뒤 러시아 핵잠수함이 북대서양에서 항해했다는 영국 더타임스의 보도도 나왔다. 서방 정보기관들은 러시아의 핵 전력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나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미국 정부는 바이든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 이후 러시아에 대한 고강도 추가 제재를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미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세컨더리 제재(2차 제재) 확대를 검토 중이며 러시아군이나 정보기관 등에 물자를 대는 러시아 회사 등을 상대로 한 미 재무부 차원의 제재 발표도 임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정보기관의 무기 조달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르니야엔지니어링, 러시아군에 기술과 장비를 공급하는 모스크바 회사 세르탈 등이 제재 대상으로 거론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