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사망한 러시아군 중 상당수는 러시아 벽지의 소수민족 출신으로 추정된다고 영국 가디언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부랴트, 다게스탄, 투바 등 러시아 벽지는 주요 지역보다 소득이 훨씬 낮아 젊은이들이 생계를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쟁에서도 위험한 임무에 주로 투입되며 소수민족의 희생이 집중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가디언은 러시아 현지 언론과 인사들을 인용해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최소 271명의 벽지 출신 군인들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부랴트 지역의 독립언론 루디 바이칼라는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이 지역 출신 전사자가 최소 45명이라고 보도했다. 부랴트는 몽골과 국경을 접한 바이칼 호수 인근 지역이다. 캅카스(코카서스) 산악지대의 벽지 도시 다게스탄에서도 최소 130명의 지역 군인이 사망했다는 라디오 보도가 나왔다. 몽골과 국경을 접한 투바 출신의 한 상원의원은 96명의 지역 군인이 전사했다고 밝혔다.
세 지역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 숫자는 러시아가 지금까지 밝힌 전체 전사자 숫자(1351명)의 약 20%에 달한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물론 러시아의 공식 사망자 통계는 서방이 추정한 것보다 훨씬 적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는 벽지 지역에서 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러시아 군사 전문가인 파블 루진은 "죽고 있는 많은 병사들이 부랴트, 다게스탄과 같은 빈곤한 '소수민족 공화국' 출신이라는 것이 명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수민족 군인들의 희생이 커지고 있는 것은 이들 민족의 빈곤 문제와 연관이 있다. 러시아는 85개의 연방 주체로 이뤄진 국가로, 이 가운데 22개 연방 주체는 비러시아 민족들이 세운 공화국이다. 루진에 따르면 비러시아 민족 공화국의 젊은이들은 의무징병제가 종료된 후 입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신들이 속한 공화국이 러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데 반해, 군대는 일정한 봉급과 직업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부라탸공화국은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들의 월평균 임금은 4만 4000루블(약 64만원)에 그칠 정도로 가난하다.
소수 민족을 향한 러시아 국민들의 무관심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루진은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의 '파란 눈'을 지닌 군인의 죽음보다 부랴트, 다게스탄 출신 군인들의 죽음에 무관심할 것"이라며 "이러한 태도는 군 지휘부에게도 반영되기 때문에 부랴트 출신 군인들은 다른 부대들이 가지 않는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랴트의 한 탱크여단은 지난 2015년 우크라이나 내전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러시아 당국은 줄곧 자국군의 개입을 부인해 왔다.
가디언은 소수민족 군인들의 죽음이 잇따르는 것에 대한 지역사회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부랴트를 지역구로 둔 뱌체슬라브 마르하에프 국가두마(의회) 의원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숨겼다"며 비난했다. 해외에 거주하는 부랴트인들도 '전쟁에 반대하는 부랴트인들' 이라는 반전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특히 부랴트인 이리나 오치로바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텔레그램에 공유한 동영상에서 자신의 아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것을 보고 1인용 피켓 시위를 시작했다. 아들을 구해달라는 요구에 대해 아직도 군 당국의 응답을 받지 못한 그는 "아들이 살아 있을지를 생각하면 밤에 잠을 잘 수조차 없다"고 가디언에 토로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