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규제 개혁이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외 복합 위기로 경제가 침체 조짐을 보이자 규제 개혁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감안해 새 정부 관계자들은 연일 규제 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당선 직후 ‘신발 속 돌멩이’를 언급한 데 이어 최근에는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래주머니를 벗겨드리겠다”고 밝혔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도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투자의 족쇄를 가급적 빨리 풀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온갖 규제 속에서 경영에 애로를 느꼈던 기업인들에게는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다.
그런데 규제 개혁은 말만 한다고 해서 저절로 성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실천이 중요하다. 과거를 돌아보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규제 개혁을 약속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규제의 전봇대’를, 박근혜 정부에서는 ‘손톱 밑 가시’를 뽑아 주겠다고 했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규제의 샌드박스’를 내세웠지만 산업 현장에서 기업들의 체감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반도체가 대표적인 사례다. SK하이닉스는 2019년 2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차세대 메모리 생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착공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원인은 규제 때문이다. 사업장이 위치한 용인시는 물론 인근 안성시 주민들의 반대 목소리까지 더해지면서 환경 영향 평가 작업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여기에 문화재 발굴이나 전력·용수 공급 등 앞으로 정부 부처나 지자체와 협의를 거쳐야 할 일들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로 인해 회사 측이 당초 계획했던 착공 일정이 늦춰지면서 반도체 양산은 일러야 2026년에나 가능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계획 발표 이후 무려 7년이 지나서야 본격 가동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와는 확연히 대비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신규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후 올해 바로 착공에 들어가 2024년 하반기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SK하이닉스보다 2년 이상 늦게 계획을 세우고도 양산은 2년이나 빠른 셈이다. 그야말로 초스피드다. 미국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규제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은 반도체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산업 현장마다 규제로 투자가 지연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파업 시 대체근로 금지나 감사위원 분리 선출 규정 등 우리나라에만 있는 규제도 수두룩하다. 기업인을 잠재적인 범법자로 만드는 중대재해처벌법 같은 핵심 규제도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말로는 규제 개혁을 하겠다고 하면서 돌아서서는 기업을 옥죄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규제 입법의 상당수가 의원입법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이다. 정부 입법은 규제에 따른 비용과 편익을 따져보게 돼 있지만 의원입법은 이마저도 없다. 규제 영향 평가의 사각 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런 상태에서 기업들이 국내 투자를 늘리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새 정부가 이전 정부에서 하지 못한 규제 개혁에 성과를 내려면 접근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지금처럼 기업이 사안마다 정부 부처나 지자체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규제에 대응하는 식으로는 투자의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정부 내에 전담 조직을 두고 원스톱으로 해결해야 한다. 규제 샌드박스가 효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도 여러 부처가 관계되는 신산업의 컨트롤타워가 없다보니 시간만 질질 끌다가 결국 사업이 흐지부지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의원입법도 입법 영향 평가를 받도록 해 부작용을 사전에 걸러줘야 한다.
지금은 코로나19 장기화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 등으로 악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복합 위기 상황이다. 이로 인해 스태그플레이션 발생도 우려된다. 올해 우리나라의 성장률이 2%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경제 전시’ 상황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경제를 살리려면 말로만 규제 개혁 운운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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