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앵커'에는 다양한 모습의 공포가 존재한다. 등골이 서늘하고 오싹한 공포, 사회적으로 도태될지 모른다는 공포, 소중한 이에게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다. 여러 가지 이름의 공포가 한 데 어우러져 강렬한 서스펜스를 만들었다.
'앵커'(감독 정지연)는 방송국 간판 앵커 세라(천우희)에게 누군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며 직접 취재해 달라는 제보 전화가 걸려온 후, 그에게 벌어지는 기묘한 일을 그린다. 아나운서로 시작해 9시 뉴스 앵커가 된 세라는 기자로 전직해 새로 커리어를 쌓을 정도로 진정한 앵커가 되길 원한다. 어느 날 세라에게 죽음을 예고하는 제보 전화가 걸려온다. 장난전화로 치부하기에 찝찝한 세라는 엄마 소정(이혜영)에게 털어놓고, 소정은 "진짜 앵커가 될 기회"라고 설득한다. 결국 제보자 미소의 집으로 향한 세라는 미소와 딸의 시신을 목격한다. 그날 이후 죽은 제보자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세라. 사건 현장에서 제보자의 주치의였던 정신과 의사 인호(신하균)을 마주하게 되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작품은 모녀관계에 집중한다. 소정과 세라, 미소와 그의 딸 등 다양한 모녀관계가 나온다. 과도하게 세라에게 집착하는 소정은 어떻게든 딸을 앵커로 성공시키겠다는 마음만 가득하다. 가정이 세라의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해 이혼을 종용하고, 임신을 막을 정도다. 세라는 이런 엄마에게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여성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모녀 사이는 사랑과 증오, 연민과 짜증이라는 양가감정 안에 있다.
이는 '모성애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거 잘나가던 소정은 세라를 갖고 커리어가 끊기자 사랑과 미움이 뒤엉킨 감정을 느낀다. 본능적인 모성애에 이끌려 세라를 낳았지만, 이상과 다른 현실이 그를 걷잡을 수 없는 증오로 내몬다. 세라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아이를 갖게 되면 자신의 커리어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럼에도 작품 기저에는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 깔려 있어 공감을 더한다. 작품은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이었던 여성에게 모성애란 무엇인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커리어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세라의 마음은 작품의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어우러져 시너지를 낸다. 미소의 환영이 거듭해 나타날수록 피폐해져 가는 세라의 모습,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소정, 선인지 악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인호의 미스터리함은 관객을 환상의 서스펜스로 초대한다. 여기에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뉴스의 특성이 더해져 긴장감과 몰입도를 높인다.
최면으로 들여다본 세라 내면의 무의식도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한몫한다. 세라는 미소의 환영을 떨치기 위해 최면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다. 극 초반과 같은 장면이 연출되며 관객들은 공포스러운 지점을 알고 다시 봐야 된다는 색다른 스릴에 사로잡힌다. 또, 세라 내면은 작품의 전체적인 복선으로 작용해 미스터리를 열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모든 건 배우들의 열연으로 완성된다. 천우희는 외형부터 말투까지 앵커 그 자체로 변신했다. 짧은 단발과 수트로 완성한 비주얼과 뉴스를 진행할 때의 톤, 어조, 자세는 당장 뉴스를 진행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특히 천우희는 메인 뉴스, 특집 뉴스, 리포팅 등 다양한 상황에서 미묘하게 차이를 두는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모성애의 중심에 선 이혜영은 사랑과 증오의 양가감정을 정확하게 그렸다. 지극정성으로 딸을 돌보면서도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충족하려는 이기적인 모습을 신경질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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