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열리고 있는 제44회 KLPGA 챔피언십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대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978년 창설됐다. 한국 여자 골프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KLPGA 투어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일본여자프로골프(JLPGA)와 함께 3대 투어가 됐다. 실력은 세계 최강이다. 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최근에는 젊은 여성 골퍼 인구도 급속히 늘었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골프를 즐기는 ‘신여성’은 귀했다. 남성 중심의 시대적 사고와 골프는 남성 스포츠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런 편견과 냉대에 맞서온 한국 여성 골프의 개척자들은 누구일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은 1920~193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골프를 즐긴 이방자 여사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결혼한 이 여사는 일본의 명문 도쿄 골프클럽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 여사는 1962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일본 황족이었고 한국의 여성 골프에 미친 영향은 사실상 없다.
오랜 공백기를 거친 끝에 1960년대 여성 골퍼들도 하나둘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고급 요정 청운각의 주인이었던 조차임이다. 그는 당시 사교의 중심이 요정에서 필드로 옮겨가는 것을 재빠르게 눈치챘다. 서울컨트리클럽(CC)에 회원 가입 신청을 했다. 소문을 들은 일부 회원은 “요식업의 ‘마담’이 가입한다는 말이냐”며 반발했다. 하지만 청운각의 단골이었던 이순용 서울CC 이사장이 적극 나서 무마했다. 1963년 3월의 일이다. 앞서 서울CC 회원 명부에 영화배우 김지미와 시인 모윤숙이 등재돼 있었지만 이들이 라운드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에는 가입 승낙만 받고 실제로는 활동하지 않은 ‘수면 회원’들도 꽤 됐다고 한다. 클럽에 가입하고 실질적으로 플레이를 한 최초의 여성 골퍼가 조차임이다.
국악인 안비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57년 일본에 장기 공연을 갔다가 그곳에서 일본 연예인들 손에 이끌려 골프를 접했다. 귀국 후 사보이호텔 맞은편 서울빌딩 옥상에 3타석짜리 실내 연습장을 운영하기도 했던 안비취는 ‘안 교장’으로도 불렸다. 1960년대 후반에는 삼성 창업주 이병철과 그의 맏딸 이인희도 가끔 안비취의 명동 연습장에 들르고는 했다. 안비취는 서울CC 회원들과 자주 어울리고 친분 있는 기업인들에게 회원권을 사도록 권유해 수십 명을 가입시켰지만 정작 본인은 회원이 되지는 못했다. YWCA 총무를 지낸 손인실도 1960년께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병철의 손에 이끌려 골프를 배운 이인희 전 한솔그룹 고문은 1970년대 한국여성골프협회 창설에 참여해 회장을 역임하는 등 여성 골프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1990년대에는 오크밸리를 건설해 골프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최초의 여자 골프 대회는 1976년 열린 한국아마추어부녀선수권(현 강민구배 한국여자아마추어선수권)이다. 당초 이보다 4년 앞선 1972년에 1회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문교부가 ‘국내 분위기로 보아 부녀 경기는 시기상조’라고 권고해 무산됐다. 이 대회에는 삼성가의 이인희·명희 자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부인 정희자 등도 자주 참가해 기량을 뽐냈다.
한국 최초의 여성 프로골퍼가 탄생한 것은 1978년 5월이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내에 ‘여자 프로부’가 생기면서다. 경기 양주 로얄CC(현 레이크우드CC)에서 열린 프로 테스트에 13명이 출전해 강춘자·한명현·구옥희·안종현 4명이 통과했다. 1호 영광은 현재 KLPGA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강춘자에게 돌아갔다. 1기 회원 4명 중 현재 강 대표이사만 생존해 있다.
1978년 9월에는 첫 여성 프로 대회인 KLPGA 챔피언십이 열렸다. 한명현이 우승했다. 그는 1983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JLPGA 투어 프로 테스트를 통과했다. 구옥희는 1988년 한국인 최초로 LPGA 투어 대회(스탠다드 레지스터 클래식)를 제패했다. 1988년은 남자 협회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여자 골프가 KLPGA로 독립한 해이기도 하다.
10년 후인 1998년 박세리가 최초로 LPGA 투어 정규 멤버로 진출해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것을 신호탄으로 신지애(첫 세계 랭킹 1위)·박인비(첫 커리어 그랜드슬램과 올림픽 금메달)·고진영(첫 LPGA 투어 전관왕과 3년 연속 상금왕) 등이 이어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시기상조라 할 게 아니고 좀 더 일찍 여성 골프를 육성했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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