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친 미국의 경제성장률도 달러화 강세를 꺾지 못했다. 28일(현지 시간) 미국의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1.4%(전분기 대비 연환산 기준)에 그쳤다는 미 상무부의 발표에도 월가는 “소비는 되레 증가하고 있다”며 환호했고, 이날 나스닥이 3% 넘게 폭등하는 등 뉴욕 증시 주요 지수는 일제히 상승했다. 시장에서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정책 방향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힘을 받았다. 블룸버그통신은 “갑작스러운 마이너스 성장이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정치적으로 골칫거리가 되겠지만 연준이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해 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짚었다.
투자자들 입장에서 높은 금리는 미국 자산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달러화 가치를 끌어올린다. 유로·엔 등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 인덱스는 이날 장중 103.93까지 올라 20년 만에 최고치로 올랐다.
시장이 이토록 달러화 자산으로 몰려드는 데는 유로존과 일본·중국의 상황이 녹록지 않은 영향이 크다. 우선 유럽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장기화에 따른 변동성이 크다. 베렌베르크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홀커 슈밀딩은 “에너지와 식량 가격 상승과 경기 둔화에 유럽은 2분기에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둔화 속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질 것”이라며 “러시아의 유럽 가스 공급이 갑자기 중단되면 유럽은 경기 침체로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일본은 좀처럼 경기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고 중국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주요 도시로 봉쇄가 확산하면서 올해 5%대 성장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때문에 양국 중앙은행은 공격적인 긴축 행보를 보이는 연준과 달리 여전히 통화 완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로화 가치가 연일 곤두박질치자 6년간 ‘제로’ 수준을 고수해 온 금리를 하반기 중 인상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연준이 ‘빅스텝’을 밟는 미국과의 금리 차이는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달러화 강세가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하다. 제인 폴리 라보뱅크 외환전략 부문장은 “올해 달러화 강세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들기 시작했다”며 “유럽, 특히 독일에 대한 에너지 공급 부족 가능성이 있으며 중국의 성장 둔화도 변수”라고 지적했다. 투자은행 UBS는 최소한 올 2분기에는 달러 강세가 유지될 것이라며 “하반기 추가적인 달러 강세가 나타날지는 3분기 글로벌 경제의 회복 정도에 달려 있다”고 내다봤다. UBS는 유로·달러 환율 전망치를 기존의 유로당 1.11달러에서 1.05달러로 낮췄다. 일본에서 ‘전설의 딜러’로 불리던 후지마키 다케시 전 모건은행(현 JP모건체이스) 도쿄지점장은 일본에서 국채 투매 현상이 나타날 경우 엔화 가치가 달러당 400~500엔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과격한 전망까지 내놓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달러는 투자자들이 위험한 투자를 포기하고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은신처를 찾을 때 좋은 성과를 내고는 한다”며 “시장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장기화와 중국의 코로나19 사례 증가를 우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원·달러 환율 역시 추가 상승(원화 가치 하락) 가능성이 높다. 2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정부의 잇단 구두 개입 영향으로 전일 대비 16원 60전 내린 1255원 90전에 거래를 마치며 사흘 만에 다시 1250원대로 내려갔다. 이억원 기획재정부 1차관은 이날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환율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다”면서 “급격한 시장 쏠림이 발생할 경우 시장 안정 조치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전날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총리가 “시장 안정 노력을 기울여나가겠다”고 말한 지 하루 만이다.
다만 환율이 일단은 상승세를 멈췄어도 달러화 상승 압력에 맞서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규연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유럽과 일본의 통화 완화와 달리 미국의 고강도 통화 긴축에 달러 강세가 이어질 것”이라며 “중국 경기 둔화 등 대외 악재를 고려하면 원·달러 환율을 1300원까지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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