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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스키타이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세계를 제패했다. 제국을 이룩한 그의 유일한 고민은 북쪽 국경을 침범해 약탈을 일삼는 스키타이족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7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족 정벌에 나섰지만 끝내 실패했다. 끝없는 평원에서 갑자기 나타나 공격한 뒤 사라지는 이들의 기동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패퇴시킨 스키타이족에 대해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서술했다.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흑해 북쪽 평원 지대에서 살던 유목 민족이다. 유목 민족의 특성상 말을 잘 다뤘고 특히 마상 궁술이 일품이었다. ‘스키타이’가 그리스어로 궁수를 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기마군단의 뛰어난 전투력을 바탕으로 적들을 굴복시키며 세력을 넓혀나갔다. 전투가 벌어지면 적의 머리를 취해 가죽은 벗겨서 손수건으로 만들고 두개골은 금박을 입혀 술잔으로 쓸 정도로 잔인하고 호전적이었다. 스키타이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문화를 흡수해 자신의 유목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동방에 전달한 동서 교류의 주역이기도 했다.



스키타이는 신라와도 문화 교류를 한 것으로 역사학계는 추측한다. 스키타이의 고분은 땅 속에 목곽을 넣고 그 위를 돌로 쌓은 뒤 봉분을 하는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유사하다. 스키타이와 신라의 금관은 한자의 산(山)자를 위아래로 붙이고 사슴뿔 같은 가지를 세워 뼈대를 만드는 등 디자인과 장식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스키타이는 한때 이집트의 파라오가 공물을 바칠 정도로 강성했다. 하지만 가혹한 수탈 탓에 이웃 국가들이 반발하면서 세력이 약해졌고 마침내 대부분의 영토를 내준 뒤 농경 생활로 연명하다가 멸망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이 점령지 멜리토폴 소재 박물관에 전시된 스키타이족의 값비싼 유물을 약탈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러시아가 인명을 무차별 살상하는 전쟁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문화재 약탈까지 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강력한 군사력만이 문화와 역사를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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