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가 활발하게 추진한 대외 정책 중 동남아시아 및 인도에 대한 지역 전략으로 경제·외교 다변화를 추구한 신남방 정책이 있다. 지난 5년 동안 한국이 이들을 중시한다는 메시지를 각인시키고 협력 기반을 다진 것은 의미 있는 외교 성과다.
하지만 미중 전략 경쟁 격화, 공급망 불안정 등 경제안보 첨예화, 해양 질서의 급속한 붕괴 등 작금의 인도태평양 전략 지형에서 신남방정책이 적절한 대응이었는지 의문이다. 우리의 개발원조, 투자와 기술은 개도국들이 선호하는 우리의 최대 강점이지만 시장 진출에만 몰두했을 뿐 우리에게 부닥친 지정학·지경학적 도전에 대한 전략은 부족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을 향해 한반도 평화를 위한 건설적인 역할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베트남 등 동남아 우방국들이 남중국해 문제로 중국과 갈등을 겪을 때 우리 정부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론만 되풀이했다. 다른 선진 민주국가들이 유엔해양법협약(UNCLOS)과 2016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결정 등 국제법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단호히 말할 때 우리는 침묵했다. 중국을 의식해 인도태평양 개념 수용을 주저하고 독자 전략으로 신남방 정책을 추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과의 협력에도 소극적이었다. 지난해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포괄적 인도태평양 협력에 합의했지만 실질적인 후속 조치는 여전히 미비하다.
가장 큰 문제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주요 전략·안보 이슈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함으로써 우리의 대외적 역량을 스스로 축소시켰다는 점이다. 그 결과 세계 10위의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략적 위상과 존재감은 한참 뒤처져 있다. 이는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결국 신남방 정책은 우리가 직면한 지정학적 파도를 헤쳐나갈 대외 전략으로 부족했다.
‘글로벌 중추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윤석열 정부는 이런 한계를 넘어서 우리의 정체성·국익·보편가치, 국제적 책임과 역할에 부합하는 포괄적 전략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지정학적 도전에 유연하고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한국의 지역적 역할을 넓히고 한층 강화해야 한다. 한국 번영의 기초가 된 국제 제도와 규범이 무너지는 현실에서 가치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해 우리 국익에 부합하는 지역 질서 구축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신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파트너로 아세안, 쿼드(Quad, 미국·호주·인도·일본 안보협의체), 특히 미중 경쟁의 한 키를 쥐고 있는 인도와 전략적 연대를 추진하고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해양 안보에서도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신남방 정책은 아세안 지역 정책으로 유지해 아세안 중시 기조를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하면 중국이 반발하고 한중 관계가 나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하지만 미중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하는 아세안조차도 이미 ‘인도태평양에 대한 아세안의 관점’이라는 독자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이 보복을 가했다든가 중국과 관계가 악화됐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은 아세안과의 관계를 ‘포괄적·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대규모 경제 지원을 약속하는 등 아세안을 더욱 끌어당기고 있다.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에 동남아 못지않은 전략적 요충지며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다. 우리의 국가적 역량을 스스로 제약하기보다 경제·전략적 역할과 레버리지(leverage)를 더욱 키우는 것이 장기적으로 중국과 상호 존중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미 인도태평양 전략 경쟁에서 많이 뒤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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