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1년 남북적십자 대표단이 분단 이후 처음 만나 나눈 대화는 팽팽한 긴장감과 기 싸움 속에 3분 만에 끝난 것으로 확인됐다. 남측에서 “수해가 많이 나지 않았느냐”고 묻자 북측이 “수해가 없었다”며 퉁명스럽게 답변해 대화 분위기가 급격히 식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통일부는 1970년 8월부터 1972년 8월까지 약 2년간 남북회담 기록이 담긴 ‘남북대화 사료집’을 일반에 처음 공개했다. 총 1,652쪽에 달하는 문서에는 제1~5차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 총 25차례의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의제문안(제1차~제13차) 및 진행절차(제1차~제3차) 실무회의 내용 등이 담겼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남북이 분단 이후 처음 대화의 장에 나선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은 3분 만에 대화가 종료됐다. 당시 대한적십자사 파견원인 이창렬 서무부장은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북측 대표단에 “안녕하십니까”란 인사를 건넸고, 북측은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답했다. 양측은 서로 신임장을 교환한 뒤 북한에서 발생한 수해에 관한 대화를 나눴는데 북측에서 불쾌한 반응을 보이자 대화는 곧 종결됐다.
남북 당국 간 최초 합의서가 당초 알려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아닌 1971년 9월 29일 체결된 사실도 확인됐다. 통일부는 1971년 9월 29일 판문점에서 열렸던 남북적십자 제2차 예비회담 자료집을 공개하면서 이 회담을 통해 체결된 적십자 예비회담 진행 절차에 관한 합의서가 남북 당국간 최초의 합의서라고 밝혔다. 회의록에는 남북간 최종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서로 담배와 차를 권하는 등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는 달리 남북이 지난 1972년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최초 5개 항 합의 때 ‘자유로운’이란 문구를 놓고 신경전을 펼친 사실도 확인됐다. 당시 회담에서 적십자 본회담에서 논의할 의제 5개 항을 채택했는데, 이는 남북 간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한 최초 회담 의제이기도 했다. 당시 합의된 의제는 1항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의 주소와 생사를 알아내며 알리는 문제, 2항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의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을 실현하는 문제, 3항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의 자유로운 서신 거래를 실시하는 문제 등이었다. 남측이 2항과 관련 “서로의 대화를 통해 ‘자유로운 방문과 자유로운 상봉을 실현하는 문제’로 확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제안하자 북측은 ‘자유로운’ 이라는 형용사가 ‘방문’과 ‘상봉’에 각각 붙을 이유가 없다고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남측이 하나의 단어로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거듭 주장하면서 북측이 결국 이를 수용해 5개 항은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번 공개 문서에 지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끌어낸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북측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 간 협상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또 이후락 부장과 김일성 당시 내각 수상의 회담 내용 역시 공개목록에는 없었다.
통일부는 “국민들의 알 권리와 대북정책 추진의 투명성을 제고하고자 남북회담 과정에서 생산되거나 접수된 문서 중 30년이 지난 것들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공개대상 문서는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 등 3곳에 마련된 남북회담 문서열람실을 직접 방문해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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