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남편이 아내를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찍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한번은 그 프로그램에 중년의 부부가 주인공으로 나왔다. 남편은 아내와 간만에 교외로 나와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느닷없이 며칠 후 퇴직하게 됐음을 고백한다. 아내는 몇십 년간 사회생활을 하느라 고생한 남편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괜찮다”고 다독였다. 그러나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눈물을 훔치며, 아직 지원이 필요한 자식과 남은 대출을 걱정한다. 물론 프로그램 끝에는 퇴직이 아내를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었음을 드러났지만, ‘퇴직’이란 말을 들었을 때 중년의 아내가 보인 모습은 아마도 퇴직을 겪을 혹은 퇴직을 겪은 우리들의 현실적인 모습일 것이다.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를 쓴 박경옥 씨도 상황은 비슷했다. 20년 넘게 전업주부로 살아온 박 씨는 대기업 임원이었던 남편의 퇴직을 예상했지만, 겪어보지 않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퇴직 이후에 대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잘 몰랐다. 그렇게 준비 없이 맞이한 남편의 퇴직에 대해 박 씨는 ‘마치 여름에 불어오는 태풍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여름의 태풍이 어떤 태풍인가.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강하게 불어와 때로는 두렵기까지 한 존재가 아닌가. 퇴직이란 박 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존재로 여겨진다.
남편의 퇴직은 박 씨 삶의 대부분을 바꿔 놓았다. 대기업 임원이었던 남편은 퇴직 후 곧바로 재취업을 꿈꿨지만, 퇴직한 중년이 같은 분야로 재취업하는 일은 로또 1등보다 어려웠다. 결국 택배 승하차 일을 시작했다. 노후자금으로 믿고 있었던 우리사주는 전 회사가 망하면서 그야말로 휴짓조각이 됐다. 마지막 보루로 갖고 있던 아파트는 팔자마자 값이 폭등했고, 부부는 공장 옆 작은 빌라로 거주지를 옮겼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퇴직 후 모든 상황이 나빠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인 박 씨는 20년 만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복지센터에서 강사로 활동을 시작하며,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그는 책을 통해 “남편의 퇴직은 아내가 남편의 그늘을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표현했다. 이때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내들은 노년에 우울과 병에 시달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수를 하더라도 바깥세상으로 나오라고 조언한다. 남편의 그늘을 뛰어넘어 인생 2막에 강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박 씨처럼 말이다.
부부 사이도 좋아졌다. 부부 모두 대학원에 등록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며 인생 2막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서로를 지지하고 독려하며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퇴직 이후 인생의 핵겨울을 경험했지만, 그 겨울 이후 봄이 올 것을 알고 준비하기 위해 부부는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다.
박경옥 씨는 남편의 퇴직 이후 자신이 경험한 것과 그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을 공유하기 위해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를 썼다. 그가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퇴직이 결코 이벤트가 아닌 ‘일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한 축을 담당하던 남편 또는 아빠의 퇴직은 가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퇴직 이후 삶에 대해서도 가족 모두 진심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씨는 이 추상적인 노력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구체적인 내용으로 책에 담아냈다. 책에는 퇴직한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 퇴직 이후 아내가 집안의 기둥이 되어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법, 지혜롭게 살림을 줄여가는 법, 돈이 적게 있어도 즐겁게 건강하게 사는 법 등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퇴직 쓰나미는 아내가 남편의 그늘을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50세 이후 남편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울과 병에 시달리기 쉽다. 아내는 실수를 하더라도 바깥에 나가 세상과 부딪쳐야 한다. 어차피 실수 없이 완벽하게 살 수는 없다.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용기를 내라. 말실수는 행동의 실수보다 뒷감당이 낫다. 처음엔 작은 목소리이지만 점점 힘이 생긴다. 말에 따른 행동을 하기 위해 열심히 하다 보면 실력이 점점 는다. 전문가가 된다. 남편이 나가기를 기다리지 말고 나의 실력이 쌓이는 걸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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