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주택정책의 초점을 4인 가구 기준 아파트에만 맞출 것입니까. 2040년에는 1인 가구 비중이 전체 가구의 35%를 넘게 됩니다. 이처럼 크게 달라지는 인구 구성과 주거 트렌드에 맞춰 새 정부가 공약한 1기 신도시 재정비도 이뤄져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을 목전에 두고 서울 강남구 역삼동 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승배 한국부동산개발협회장은 ‘1기 신도시 재정비’가 단순히 헌 집을 새 집으로 다시 짓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새롭게 창조하는 수준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업계를 대표하는 디벨로퍼(부동산 개발 업자)로 손꼽히는 김 회장이 1기 신도시 재정비 방향을 공론화하는 것은 단순히 차기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공약이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주거 인프라 구축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1기 신도시는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가 초고속 성장하던 시절 집값 안정과 주택난 해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한 택지 개발 사업이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경기도 분당·일산·산본·중동·평촌 등 5곳에 잇따라 조성돼 30만 가구가 터 잡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 1기 신도시에 질서 있게 지어진 아파트 단지와 단정하게 정돈된 도로, 도시 중심에 자리한 대형 공원 등은 이후 지어지는 신도시가 따라야 할 ‘교본’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준공 30년이 지난 지금 1기 신도시는 낡고 녹슬어 가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 대선 후보가 공히 재정비를 약속한 이유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노후한 주거 인프라 탓이 크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회에서도 1기 신도시 재정비를 위한 특별법을 내놓는 등 재건축 추진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1기 신도시만큼은 평범한 재건축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10년 뒤를 내다봐야 한다”면서 “가구 수가 정점을 찍는 2040년께 1인 가구와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급증한 상황이 되면 4인 가구가 당연시되던 시절의 주택 보급 정책에 기반한 도시 계획은 시대착오적이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김 회장이 구상하는 1기 신도시 재정비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는 “1기 신도시는 ‘콤팩트앤드스마트’를 키워드로 하고 부지 활용 방식을 인구구조에 맞춰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1~2인 가구 위주로 평형을 구성하는 대신 공급 가구 수를 늘리고 저출산 세태를 반영해 학교 부지를 고령층을 위한 커뮤니티센터 등으로 바꾸는 등의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또 1기 신도시 주민들이 원한다면 이번 기회에 ‘자산의 재구축’도 추진해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현재 1기 신도시에서 30평대 아파트에 거주하는 50대가 재정비를 거치며 주택을 20평대로 줄이는 대신 나머지 10평에 대한 지분은 리츠(부동산 투자 회사)에 넣어 주기적으로 배당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현재 집 한 채만 보유하고 있어도 장기적인 수익이 확보되는 만큼 은퇴를 앞둔 개인에게 힘이 될 뿐만 아니라 리츠를 기반으로 형성한 자본을 통해 신도시의 상업용 부동산 개발도 활성화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1기 신도시 재정비 과정에서 난항이 예상되는 이주 문제에 대해서도 김 회장은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순환 재건축을 기본으로 하면 주변 전세 가격에도 영향을 덜 미칠 것”이라며 “용적률을 다소 높여 조합원이 필요한 주택에 플러스 알파를 충족하는 동시에 저층과 초고층, 주택과 준주택을 섞어 개발하는 방식으로 해야 이주로 발생하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기 신도시 특별법을 상정한 국회의원들은 용적률 상향 조정, 교통 인프라 마련 같은 굵직한 내용만 언급했을 뿐 구체적인 방안은 아직 제시하지 않은 상태다.
또 분당과 일산 등 일부 지역 아파트 가격이 뛰는 모습이 보이더라도 연연하면 안 된다는 점도 김 회장은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순간순간 주택 가격에 매달리게 되면 당초 세웠던 주거 정책의 목표를 상실하고 사회 변화에 정책이 끌려 다니게 되면서 오히려 장기적으로 주거 불안정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제도 완화에 따른 시장의 충격은 시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며 이때 발생하는 국소적 현상에 대해 대증요법으로 접근한다면 새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실현 가능한 부동산 정책에 대한 의견을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김 회장은 부동산 업계 경력만 40년 차인 베테랑이다. 1983년 건설 사관 학교로 불리는 대우건설에 입사해 ‘저렴한 비용으로 좋은 집을 짓겠다’는 사명감으로 대단지 아파트는 물론 주상복합과 원룸형 오피스텔, 골프텔, 고급 빌라 등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를 이끌며 주택 사업 담당 이사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끼던 그는 ‘디벨로퍼’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2005년, 라틴어로 신뢰를 뜻하는 ‘피데스’를 사명으로 한 피데스개발을 세워 부동산 개발업에 뛰어들었다. 업계에서는 그를 ‘1세대 디벨로퍼’라 칭한다. 김 회장은 디벨로퍼의 업무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에 비유했다. 그는 “이전에 종사했던 건설업이 ‘생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디벨로퍼의 업무는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기획하고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 것부터 운영하고 철거 이후 신축하는 것까지 모두 관여하는 종합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국토교통부나 서울시·대통령직인수위원회 등에서 부동산 정책을 추진하기 전에 ‘시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면담을 요청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제5대 회장을 맡아 이끌고 있는 한국부동산개발협회는 2700여 개 개발업 등록 업체와 820개 회원사를 대변해 업체들이 개발 현장에서 겪는 여러 문제점을 정부에 건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연간 1만 7000여 명이 넘는 개발 전문 인력을 교육하는 것도 협회의 일이다.
취임 3년 차를 맞은 김 회장은 최근 협회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협회는 정부와 협의해 소형 주택(옛 도시형생활주택)의 세대별 주거 전용면적 상한을 과거 50㎡에서 소형 아파트 수준인 60㎡ 이하로 확대하는 시행령 변경을 이끌어냈다. 오피스텔의 전용면적 120㎡ 이하까지 바닥 난방 설치가 가능하도록 건축 기준을 개정하는 성과도 냈다. 김 회장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시장 흐름을 꿰뚫는 목소리를 정책 입안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협회는 사무국에 정책연구실을 별도로 만들고 ‘부동산개발업 선진화 방안’부터 ‘개발 업계가 선정한 정책 건의 100선’ 등을 잇따라 내놓았다. 차기 정부와 서울시에서 눈여겨보는 것으로 알려진 도심 고밀 복합 개발과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 현실화, 청년 내 집 마련 금융 지원 등도 이 보고서에서 모두 다룰 정도로 영향력이 상당하다. 현재 협회 정책연구실에서는 금리 인상, 원자재 값 상승, 중대재해처벌법 등 소위 ‘삼중고’ 현상이 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며 부동산 전문 싱크탱크로서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다.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만들 때 힘을 보태고 싶었다”는 김 회장은 “개발의 본질을 이해하는 디벨로퍼가 많아져 디벨로퍼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사라졌으면 한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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