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치러질 필리핀의 대통령선거에서 36년 전 시민혁명으로 불명예 퇴진했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신사회운동(KBL) 전 상원의원의 당선이 사실상 확실시되고 있다.
7일(현지시간)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설문조사기관 펄스아시아가 지난달 16~21일 18세 이상 성인 24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56%가 9일 대선에서 마르코스 주니어를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은 23%, 매니 파키아오 상원의원은 7%, 프란시스코 도마고소 마닐라 시장은 4%에 그쳤다. 통신은 마르코스가 과반수 이상을 득표할 경우 자신의 아버지에 이어 처음으로 과반수 이상을 확보한 대통령이 된다고 전했다.
마르코스 주니어의 높은 지지율의 배경에는 소셜미디어가 있다. AFP는 "마르코스의 폭력적이고 부패했던 통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젊은 유권자들을 겨냥한 소셜미디어상의 허위정보 캠페인이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필리핀 미디어 모니터링연구소의 공동의장인 파티마 가우는 CNN에 "그들은 마르코스 시대가 필리핀의 황금기라는 조작된 이야기를 퍼뜨리기 위해 유튜브의 인플루언서 등을 이용해왔다"며 "유튜브는 마르코스의 잔혹행위를 부정·왜곡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는 비디오의 온상"이라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필리핀인들이 소셜 미디어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이 때문에 허위정보에 대해 더욱 취약해졌다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마르코스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필리핀에서 가장 많은 영웅이었으며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당시 필리핀의 군대가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했고 △마르코스 일가가 세상을 구할 정도로 많은 양의 금을 소유하고 있다는 등의 거짓 정보가 소셜미디어상에 넘쳐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마르코스의 장기집권을 겪은 필리핀은 1987년 대통령의 임기를 6년 단임제로 제한했는데, 마르코스 주니어가 높은 득표율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개헌을 밀어붙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 대통령인 로드리고 두테르테를 포함해 이전 정부도 이를 시도했으나, 의회에서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해 개헌에는 실패한 바 있다. 이 밖에 마르코스 일가의 재산 환수 등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통령 직속 바른정부위원회(PCGG)를 마르코스 주니어가 이끌게 된다는 점도 문제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친중 행보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미 경제방송 CNBC는 "유력한 당선후보들 중에서 마르코스 주니어는 중국에 가장 우호적인 후보자로, 마르코스 주니어가 당선될 경우 두테르테의 친중 정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외교협회(CFR)의 조슈아 컬란치크 동남아시아 선임연구원도 "마르코스 주니어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며 "그가 중국이 지원하는 인프라 프로젝트를 더 많이 시작하는 것을 포함해 중국에 다시 한번 구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필리핀과 중국 간의 남중국해 영토 분쟁을 포함해 필리핀 내에서 반중정서가 커진 만큼 마르코스 주니어의 친중 행보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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