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감정이 있다. 오히려 말로 표현했을 때보다 더 강력한 울림을 남기기도 한다. 절망에 빠진 한 인물이 겉으로는 덤덤해 보이지만, 오직 눈빛, 표정, 호흡으로 먼저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울림은 배가 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직접적인 대사 보다 간접적인 연출법을 통해 인물을 위로하고 "그래도 살아간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죽은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에 대한 상처를 지닌 연출가 겸 배우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그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와 만나 삶을 회복해 나가는 이야기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부부 가후쿠와 오토.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돼 작품 연출을 맡게 된 가후구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인 미사키를 만난다. 가후쿠는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죽은 아내가 녹음한 연극 대사 테이프를 들으며 연습한다. 점점 서로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된 가후쿠와 미사키는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보게 된다.
작품 내내 가후쿠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아내의 불륜을 목도하고, 연이어 아내의 사망까지 겪지만 가후쿠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감정선이 뚜렷하지 않다.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연출하는 연극의 대사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가후쿠가 연습하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 점이 '드라이브 마이 카'를 특별하게 만드는 연출법이다.
가후쿠의 오래된 습관은 아내가 생전 녹음해 둔 연극 대사에 맞춰 대사를 연습하는 것이다. 차 안에서 녹음본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시간이 그에게 소중하다. 이 시간을 위해 일부러 멀리 이동하기도 한다. 여느 때처럼, 차 안에서 대사를 연습하는 가후쿠. 이때 요코의 목소리로 "우린 고통받았다. 눈물이 난다"는 대사가 나온다. 녹내장을 앓던 가후쿠는 안약을 한 방울 넣고, "눈물이 난다"는 대사에 맞춰 안약 한 방울이 떨어진다. 마치 가후쿠가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연출이다. 작품은 이런 식으로 가후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연극 대사는 가후쿠의 심경만 대변하는 게 아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오토가 남겨진 가후쿠를 위로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극 말미 가후쿠가 연출한 연극의 피날레가 나오는데, 한 여인이 가후쿠가 연기한 캐릭터를 안고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죽은 오토가 가후쿠를 달래고,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 강렬한 감동을 안긴다.
아내의 죽음 이후 혼자가 된 가후쿠 앞에 나타난 건 드라이버 미사키다. 처음에 가후쿠는 자신의 차를 다른 사람이 운전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미사키의 안정적인 운전 실력을 믿고 차를 맡기면서부터 두 사람은 많은 것을 공유하게 된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일정을 따라다니면서 그의 삶 깊숙이 스며들고, 가후쿠도 점점 미사키에게 마음을 연다.
이들이 가까워지는 모습은 자동차 안에서 나타난다. 뒷자리를 고수하던 가후쿠는 어느새 조수석에 앉아 미사키와 대화를 나누고, 그를 챙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던 가후쿠가 미사키와 함께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마음을 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이 가까워졌다는 설명 역시 대사를 통해 나타나지 않지만, 자동차 안에서의 위치 변화를 통해 심리적으로 가까워졌다는 걸 보여준다.
작품에는 다양한 언어의 대사가 나온다.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그리고 수어까지. 다른 언어일지라도 인물의 감정은 강렬하게 전달된다. 작품은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만 있다면, 언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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