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민주화 이후의 역대 대통령과 달랐다. 국정의 수많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문제의 본질과 해법을 관통하는 가치와 철학에 주안점을 두었다. 취임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민족’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고, 자유 시민과 세계 시민·글로벌 리더국가·반지성주의 등의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개인의 자유를 확대해 경제를 성장시키고, 빠른 성장을 통해 분배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형성된 정치경제사회체제, 즉 87체제와 결을 달리한다. 87체제는 정부의 역할을 확대해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해결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앞세워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성장과 분배가 모두 악화했고, 북한의 위협은 핵 무장으로 거세어졌다.
87체제는 민주주의의 결함으로 나타났다.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을 넘어 맹목적인 지지자가 국정을 좌우하는 팬덤정치로 악화됐다. 그 결과 보편적 가치인 자유는 억압받았고, 복지 지출을 늘렸지만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했고, 양극화는 커졌다. 북한과의 평화를 강조했지만 평화는 더 멀어졌고 한국은 더 분열되었다. 윤 대통령은 민주주의 결함의 근본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지적했고,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와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는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 피웠다고 했다. 우리 모두 자유 시민이 되어야 한다며,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겠다고 했다. 자유는 승자독식이 아니고,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기초, 공정한 교육과 문화의 접근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냉전체제를 대신했던 세계화는 87체제의 허점을 덮어 두었다. 세계화 덕분에 수출이 급증하면서 경제성장이 지속돼 불만을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계에 왔다. 글로벌 공급망이 파괴되면서 물가불안 속의 경기침체와 고용악화 즉 스태그플레이션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세계화를 통해 자유와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던 이상은 중국과 러시아 등 독재 국가들이 자원을 무기화하고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함으로써 실패했다. 윤 대통령은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로 글로벌 리더국가가 되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드는데 나서겠다고 했다. 기아와 빈곤, 공권력과 군사력에 의한 불법행위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고 자유 시민으로서 존엄한 삶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모든 세계 시민이 자유 시민으로서 연대해 도와야 한다고 했다.
국제질서가 경제안보 중심으로 급변하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와 정치사회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경제안보의 과제는 나라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의 지적대로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은 어떤 나라든 성장과 도약의 원동력이다. 윤 대통령의 인식에는 철학적 토대가 보인다. ‘선택할 자유’의 저자 밀턴 프리더만 교수는 정부의 과도한 규제가 성장과 분배를 악화시켜 ‘정부의 역설’이 발생하고,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 교수는 불평등은 기득권 세력이 자신에게 유리한 제도를 만들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저자 막스 웨버 교수는 합리적 사고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저자 조지프 슘페터 교수는 자유가 혁신의 원천이라고 했다. 이러한 경제학 대가들의 주장이 일반 사람에게 생소하지 않다. 윤 대통령의 철학이 실현되도록 지식인들은 물론 시민사회가 국민의 공감을 모으는데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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