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이 회사 대표 몰래 은행에 맡겨둔 거액을 빼돌린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이 금융기관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다. 은행에 맡겨둔 돈이 은행 직원들의 묵인·방조로 인출됐다면 해당 금융기관이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병원장 A씨가 지역의 한 금융기관을 상대로 낸 예탁금지급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금융기관 측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16일 밝혔다.
A씨는 2011년 1월부터 4월 사이 직원 B씨에게 금융기관에 57억원을 예금하라고 지시했다. B씨는 예탁금계좌를 개설하면서 통장을 발급 받은 뒤, 분실했다며 새로운 통장을 발급받는 방식 등으로 A씨의 돈 총 57억원을 빼돌렸다. 이 사건으로 B씨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법)상 사기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고, 금융기관 직원들은 사기 방조 혐의로 입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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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A씨는 해당 금융기관을 상대로 예금 57억여원과 이자 반환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B씨가 자신의 예금채권을 침해하는 과정에 금융기관 직원들이 묵인·방조라는 공동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므로 사용자인 금융기관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예비적으로 손해배상도 청구했다.
1, 2심은 A씨의 예금채권은 소송 제기 이전에 상법에 따른 5년의 소멸시효기간이 지나 돌려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예금채권을 상실하게 된 것은 결국 B씨의 불법행위 때문이 아니라 나머지 예금채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됐기 때문”이라며 “소멸시효 완성의 효력으로 예금채권이 소멸된 것이 B씨의 불법행위와 상당인과관계 있는 손해라고 볼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뒤집고 A씨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B씨와 금융기관 직원들에 의한 예금 무단 인출 및 이체행위가 없었더라면 원고의 예금채권에 대한 소멸시효 완성이라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금융기관 직원들로서는 B씨에게 통장을 재발급하고 예금을 무단인출 및 이체해 줄 당시 그로 인한 결과를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며 “설령 원고에게 예금채권에 대한 권리행사를 태만히 한 과실이 인정되더라도 그러한 사정은 손해배상의 범위를 정함에 있어 과실상계의 사유로 참작되어야 할 뿐이고 상당 인과관계를 부정할 사유는 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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