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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고틀란드





바이킹은 머리에는 뿔 투구를 쓰고 손에는 도끼를 든 채 나타나 식량 등을 약탈해가는 야만인으로 묘사되곤 했다. 바이킹은 오랜 세월 서유럽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로 무장한 채 중계무역으로 힘을 키운 상인의 얼굴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드넓은 바다를 주름잡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력과 경제력 덕분이었지만 지리적 입지도 큰 역할을 했다. 발트해의 한가운데 위치한 고틀란드섬은 ‘바이킹의 섬’으로도 불린다. 바이킹은 이곳에 살며 주변 지역들을 약탈하고 식민지를 개척하는 한편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상품을 중계하며 발트해 무역을 주도했다.

중세에는 독일 상인들이 ‘한자 동맹(발트해 연안의 여러 도시들이 상권 확장과 안전 보장 등을 위해 결성한 동맹)’의 중심지가 되는 고틀란드에 정착하면서 이 지역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고틀란드의 주도인 비스뷔는 세계 곳곳의 무역상들이 모여들어 국제도시로 발돋움했다. 이때 축조된 3.4㎞ 길이의 링무렌 돌벽은 지금도 잘 보존돼 중세 유럽의 풍경을 보여준다. 유네스코는 1995년 비스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고틀란드는 1350년 흑사병이 창궐하고 1361년 덴마크가 점령하면서 경제력이 약화돼 더 이상 무역 중심지 역할을 하기 어렵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에 접어들어 발트해는 러시아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대결장이 됐다. 과거 무역 중심지였던 고틀란드는 자연스럽게 군사적 요충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어 소련이 붕괴된 뒤 스웨덴은 2005년까지 고틀란드 병력을 철수했다.



하지만 발트해에서 다시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자 스웨덴은 10여 년 만에 고틀란드에 수백 명의 병력을 재배치했다. 올해 들어 스웨덴은 고틀란드 병력 증강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가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군용기로 고틀란드 근처에서 영공을 침범하며 위협하자 스웨덴이 맞대응에 나선 것이다. 스웨덴은 나폴레옹전쟁을 끝으로 200여 년 동안 군사 비동맹과 중립국을 고수해왔다. 스웨덴이 중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나토 가입을 서두르는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안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평화를 지키려면 자체 군사력을 키우고 확실한 동맹을 확보해야 한다. 한미 동맹 격상과 진화가 요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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