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끝나자 세계는 자유무역으로 평화 체제를 유지하려 했지만 약효는 30년을 가지 못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세계화 덕분에 커진 경제력을 이용해 2010년대 중반부터 다른 나라를 위협했다.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은 그 힘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었고 러시아도 천연가스와 원유를 무기 삼아 유럽을 회유했다. 게다가 미국으로부터 빼돌린 첨단 기술로 주변 국가는 물론 미국의 안보까지 흔들었다. 이러자 미국은 경제안보로 맞서기 시작했고 이제는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자유 진영의 국가를 묶어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는 데 본격적으로 나섰다.
경제안보가 국제 질서 개편의 원리로 자리 잡고 있다. 계기는 중국의 야심을 꺾어야 한다는 각국의 공감대에 있다. 중국이 반도체 등 첨단 기술까지 장악하면 세계 평화는 물 건너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경제력으로 군사력을 키우고 안으로 독재 체제를, 또 바깥으로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우월주의를 강화했다. 이에 미국은 여야를 초월해 아시아태평양 4개국 안보협의체 쿼드(Quad)를 만든 데 이어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태평양 13개국이 참여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구축에 나서고 있다. 며칠 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도착하고 곧바로 삼성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것도 경제안보 강화를 위한 의지다.
국제 질서 개편은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국에 윤석열 정부가 등장했다. 윤석열 정부는 자유라는 가치로 미국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협력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말했지만 미국과 중국에는 경제와 안보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신뢰를 얻지 못해 결국 경제와 안보가 모두 불안해진 데 따른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과 요소수 대란, 김치와 한복의 종주국 시비 등으로 중국에 대한 호감은 급감했고 이러한 현상은 MZ세대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기업도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탈피하는 데 나섰고 이는 미국에 대한 급격한 투자 확대로 나타났다.
변화는 위험과 기회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도 마찬가지다. 기회로 활용하려면 경제 혁신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식량부터 원자재까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문제를 수반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가는 뛰고 금리는 올라가며 경기가 둔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연구개발(R&D) 투자와 첨단 기술 개발로 공급 능력을 높여야 한다. 또 숙련된 노동력 확보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생산성과 소득이 올라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신흥국들이 희토류와 원자재, 그리고 식량을 무기화하는 지금의 상황과 유사한 1970년대 아랍 국가발(發) 석유 위기를 해결한 대응책이기도 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기회로 만드는 데 필요한 혁신의 주체는 개인과 기업이다. 정부는 혁신의 여건을 조성할 뿐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핵심이 된 반도체가 대표적 사례다. 삼성의 고(故) 이병철 회장은 1980년대 초반 경제가 마이너스성장을 하는데도 반도체에 뛰어들었다. 정부가 말릴 정도로 위험한 투자였지만 산업의 쌀이라며 감행한 덕분에 오늘날의 삼성이 됐고, 덕분에 미국과 중국도 한국을 무시하지 못한다. 윤석열 정부가 경제를 정부 중심에서 민간 중심으로 전환하고 규제를 줄인다고 했지만 혁신을 위한 기업가정신의 회복은 기업인 스스로 해야 한다. 정부가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다리기보다 기업인 스스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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