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희(36·한화큐셀)는 체구가 작다. 한때 별명이 ‘미키마우스’였다. 그렇다고 배포까지 작은 건 아니다. 5세 때부터 국가대표 수상스키 감독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수상스키를 탔다. 지금은 자제하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레이싱 트랙을 돌며 골프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스피드로 풀고는 했다. 최고 시속 230㎞까지 달린 적도 있다.
‘강심장 언니’ 지은희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유일의 매치플레이 대회를 정복했다.
30일(한국 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섀도크리크 골프클럽에서 열린 뱅크 오브 호프 매치플레이(총상금 150만 달러) 결승. 지은희는 일본의 후루에 아야카를 3홀 차로 누르고 우승 상금 22만 5000달러(약 2억 8000만 원)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해에도 이 대회에서 한국 선수 중 가장 좋은 성적(8강)을 냈던 지은희는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 7승을 올리고 올해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후루에를 맞아 한층 노련하고 여유 있는 플레이를 펼쳤다. 이날 앞서 치른 준결승전에서는 교포 앤드리아 리(미국)를 4홀 차로 꺾었다.
지은희는 이번 우승으로 2019년 1월 다이아몬드리조트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 제패 이후 3년 4개월 만에 LPGA 투어 통산 승수를 ‘6’으로 늘렸다. 많은 여자 선수들이 20대 후반이면 ‘번 아웃(탈진)’ 증세를 보이며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지은희는 오히려 30세가 넘어서면서 꽃을 피웠다. 2009년 US 여자오픈에서 통산 2승째를 달성한 후 7년 넘게 우승이 없다가 2017년 스윙잉스커츠 타이완 챔피언십을 시작으로 30세 이후에만 4승을 거뒀다. LPGA 투어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선수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그는 한국인 최고령 우승 기록(36세 17일)도 새롭게 작성했다. 종전 기록은 2020년 ISPS 한다 빅 오픈 때 박희영(35)이 세웠던 32세 8개월 16일이었다.
이번 대회 조별리그가 끝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은희를 우승 후보로 꼽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은희는 16강전에서 최혜진(23)을 2홀 차로 꺾으며 이변을 예고했다. 매치플레이는 두둑한 배짱과 경기 운영 능력도 중요하지만 결승까지 7라운드를 치르는 ‘마라톤 승부’인 만큼 체력이 필수다. 지은희는 8강과 4강전에서 각각 7홀과 4홀 차 대승을 거둔 덕에 체력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퍼팅이 빛을 발했다. 조별리그 3차전에서 탈락의 위기를 맞았지만 마지막 18번 홀에서 약 6m 파 퍼트를 넣으며 무승부를 기록해 기사회생했고, 이날 결승에서는 16번 홀(파5)에서 약 3m 까다로운 내리막 파 퍼트를 넣으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에 비해 후루에는 같은 홀에서 지은희보다 짧은 파 퍼트를 실패하며 무릎을 꿇었다.
결승전 하이라이트는 9번 홀(파5)이었다. 7번 홀까지 1홀 뒤지던 지은희는 8번 홀(파4)을 따낸 데 이어 9번 홀에서 샷 이글을 기록하며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다. 내친 김에 10번 홀(파4)까지 이겨 2홀 차로 앞서 나갔다. 지은희는 9번 홀에 대해 “92야드를 남기고 52도 웨지로 쳤다”며 “잘 맞기는 했지만 들어갈 줄은 몰랐다. 그 이후로 자신감이 붙었다”고 했다.
지은희는 당초 US 여자오픈 출전권이 없었지만 이번 우승으로 마지막 한 장 남은 티켓을 획득했다. 올해 US 여자오픈은 6월 2일 개막한다. 지은희는 “올해는 못 나갈 줄 알았는데 출전하게 돼 기쁘다”면서 “다음 주도 잘 했으면 좋겠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