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은 보통 미래에 집중한다. 올해는 달랐다. 참석자들은 과거사를 고찰해가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원인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포럼에 참석한 스웨덴 재무장관은 나폴레옹 시대 이후 전쟁을 한 적이 없는 스웨덴이 200년간 고수해온 중립의 전통을 깨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하려는 이유를 설명했다. 핀란드 외무장관도 1939년부터 1940년까지 계속된 모스크바의 이른바 ‘겨울 전쟁(Winter War)’에서 핀란드인들이 전개한 치열한 저항을 소개했다.
과거 기업들은 임대한 다보스의 전시관 전면 및 건물 외벽을 역동성과 성장·혁신을 응원하는 구호와 현수막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올해는 거리 곳곳에 내걸린 플래카드와 벽보의 수가 눈에 뜨일 만큼 줄었다. 가장 관심을 끈 곳은 과거 러시아가 임대해 호화로운 칵테일파티와 캐비어 시식 공간으로 활용했던 전시관이다. 지금 전시관의 유리창에는 “다보스의 러시아 하우스였던 이곳이 지금은 러시아 전쟁범죄 하우스로 바뀌었다”는 내용의 조그만 안내문이 붙어 있다. 우크라이나의 비즈니스맨 빅토르 핀추크의 후원으로 쓰임새와 꾸밈새가 달라진 전시관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저지른 만행을 보여주는 사진과 글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우크라이나는 올해 다보스포럼의 가장 핫한 화두지만 필자가 만나본 참석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원로 정치인 타르만 샨무가라트남은 필자에게 “우리 앞에 놓인 리스크가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마주한 위험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게 아니라 충분히 예상했던 일들”이라고 강조했다. “팬데믹도, 러시아 침공 가능성도 사전에 널리 예견된 상태였고 또 다른 팬데믹과 빈번한 기후위기는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거의 확실한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는 얘기다. “우리는 평온하고 문제가 없는 시기로의 회귀를 기대하거나 계획할 수 없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중앙은행의 사령탑을 지낸 한 금융인은 “세계의 거의 모든 경제정책 결정자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전했다.
1990년 이후의 30년 동안은 국제 질서가 강대국 사이의 무력 대치와 지정학적 긴장으로 얼룩지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시기였다. 세계화와 정보 혁명, 민주화로 특정되는 1990년대 이후 30년간의 현기증 나는 추세는 지구상의 유일한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지위와 힘에 바탕을 뒀다. 그러나 이라크전,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미국의 힘은 기울었고 지금은 중국에 이어 러시아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렇듯 음울한 상황이지만 한 가지 희망 어린 징조가 있다. 유럽이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결속력과 목적의식으로 똘똘 뭉쳐 한 몸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와 대화를 나눈 유럽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대륙 전체에 혁명의 불꽃을 점화시켰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은 러시아 제재에 놀랄 만한 단합력을 과시했고, 다시 느리기는 해도 꾸준하게 에너지 정책을 조율하고 있다.
이 같은 성공은 외교는 물론 국방 정책까지 조율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을 만큼 진화할 것이다. 유럽인들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평화와 안정을 너무도 당연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평화와 안정이라는 스스로의 하드 파워를 구축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힘겨운 노력과 확고한 의지를 통해 창조되고 유지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헝가리와 같은 단일 국가가 EU의 이 같은 노력에 제동을 걸 수 있도록 만드는 현재의 답답한 전원합의제를 끝내야 한다는 논의도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번 위기의 가장 지속력 있는 유산은 세계 무대에서 강력한 목적의식을 지닌 전략적 배우로 떠오른 유럽의 새로운 역할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려면 러시아에 맞서 하나로 뭉친 경험이 성과를 내야 한다. 오직 성공만이 더 많은 성공을 불러온다. 실패는 이런 실험을 망쳐 놓을 것이다.
로베르 쉬망과 장 모네 등 역사에 조예가 깊은 EU의 창립자들은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오늘날 유럽의 지도자들은 일상적인 결정에도 이와 유사한 역사의식을 갖고 임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뒤에는 그 누구도 2022년의 몇몇 분기에 유럽의 성장이 둔화했다든지, 브뤼셀이 미국산 천연가스를 구입하느라 이전보다 많은 지출을 해야 했다는 따위의 일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과 서방국 중 우크라이나에서 누가 이겼는지 그들은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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