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어렸을 땐 돈이 없어 보지 못했어요. 장사로 돈을 모으다 보니 책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그때부터 제목만 보고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희한하게 책 사는데 쓰는 돈은 아깝지 않더라고요.”
40년 동안 수집한 책 3만 3000권을 부산도서관에 기증한 차상목씨(95·사진)는 9일 부산역 인근 게스트하우스에서 서울경제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면서 관리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내가 본 책을 남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결심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평안북도 칠선군에서 태어나 22세 때 남으로 내려온 차씨는 미국 한인 사회 최대 의료 기업 중 하나인 서울메디칼그룹 최고경영자(CEO)인 차민영 회장의 부친이다. 그가 기증한 도서는 1920년대부터 출판된 것들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정치, 경제, 역사, 군사, 무기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이중에는 ‘조선통신사 회도집성’과 같은 희귀본도 포함돼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말 사용이 엄격히 제한하던 시절이기에 읽은 책이라고는 일본 서적들 뿐이었다. 당연히 일본어와 한자에 익숙할 수 밖에 없다. 기증 도서의 90% 이상인 3만 600권이 일본어로 된 서적인 이유다. 차 씨는 “18살까지 일본어로 된 말과 글만 쓰고 읽다 보니 우리 말로 된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며 “이후 한자와 일본어로 된 책이 편해 우리말로 된 서적을 잘 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책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 살 돈을 마련하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근처에서 책방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보고 싶으면 친척에게 빌리거나 읍내까지 나가야 했다”며 “하도 책이 보고 싶어 비를 맞으며 8㎞나 떨어진 책방에 간 일도 있다”고 회상했다.
그가 책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50대부터. 부산에서 창업한 봉제 업체 미림산업의 성공으로 남 부럽지 않은 부를 쌓으면서 어릴 적 못했던 일을 해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1990년 은퇴한 뒤에는 책방을 예사로 드나들었다. 그는 ”지금은 나이도 많고 거동도 불편해 도서 구입을 그만뒀지만 책방은 당시에는 일주일에 적어도 1~2번은 꼭 갔다”며 “원하는 책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하루에 10번 넘게 찾아가곤 했다”고 덧붙였다.
책을 살 때 내용은 잘 보지 않았다고 한다. 제목이 마음에 들면 무조건 지갑부터 열었다. 샀다고 다 읽는 것도 아니다. 내용을 잠깐 보고 마음에 드는 것만 끝까지 읽었다. 그러다 보니 한번 쌌던 책을 또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는 “처음에는 책이 중복됐을 때 서점 주인에게 바꿔 달라고 했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 같아 나중에는 그만 뒀다”며 “어떤 때는 책 냄새만 맡고 살지 말지 결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차 씨에게 책이란 과거를 참고해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의 결정체다. 6000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지혜를 더듬어 봄으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식민지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가 됐다는 사실에 한때 흥분한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그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400만 명이나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왜 그랬나 후회했다”며 “책이 중요한 이유는 모르면 사물을 옳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그가 볼 때 지혜가 있는 사람은 남을 밟고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사업도 경쟁이 아닌 협력의 관계로 본다는 지론이 여기서 나온다.
추천 도서를 묻는 질문에 차 씨는 해리 트루먼 미국 33대 대통령이 쓴 자서전 ‘어쩌다 대통령, 트루먼’과 초대 스위스 대사를 지낸 고(故) 이한빈 선생의 ‘작은 나라가 사는 법’을 꼽았다. ‘어쩌다 대통령’을 통해서는 트루먼이 협잡꾼이 아닌 진정한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았고, ‘작은 나라…’에서는 어떤 정치가 좋은 정치인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스위스 국회의원들은 회기가 있을 때는 인근 호텔에서 숙식을 하고 수당도 국회에 가는 날만 받는다. 한마디로 국민이 공무원을 부리는 나라”라며 “우리도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의 시선을 무섭게 느껴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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