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가 13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1달러당 135엔을 넘어서며 1998년 10월 이후 23년 8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예상보다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한층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일본은 여전히 금융 완화정책을 고수하며 미국과 금리 차가 벌어질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거세지는 엔화 매도 압력에도 일본 통화 당국은 미미한 임금 상승세 등을 문제 삼으며 금융 완화를 포기하는 일은 없다고 선을 그어 엔화 약세에 기름을 부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엔·달러 환율은 이날 오후 도쿄 외환시장에서 장중 1달러당 135.22엔에 거래돼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10월 이후 최고치(엔화 가치 약세)를 기록했다. 엔화 약세는 달러화에 대해서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 엔·유로 환율은 이달 들어 1유로당 140엔을 돌파하며 2015년 1월 이후 7년 5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엔화 가치가 태국 밧화 등 신흥국 통화에 대해서도 낮아졌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안전자산’으로 각광받아온 엔화가 신흥국 통화보다도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세계 각국이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금리 인상에 나서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은 돈 풀기 정책을 고수하며 ‘통화정책 디커플링’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저금리 통화를 매도해 고금리 통화를 사들이는 ‘캐리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초저금리에 머무는 엔화 가치를 끌어내리고 있다는 것이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분석이다.
앞서 두 차례 기준금리 인상으로 긴축의 신호탄을 쏜 미국에서는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기 대비 8.6% 오른 것으로 나타나며 금리 인상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국중앙은행 역시 이번 주 통화정책 회의에서 다섯 차례 연속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 유럽중앙은행(ECB)도 7월 중 11년 만의 금리 인상을 예고한 상태다. 반면 일본은 -0.10%의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통화 당국은 금융 완화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날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의회에 참석해 “(엔화 급락은) 일본 경제에 부정적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코로나19 팬데믹의 충격에서 회복 중인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통화 완화정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16~17일 열리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도 금리를 동결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도 지금의 엔저에 부정적 측면이 더 많다면서도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에는 선을 그었다.
가파른 엔저 부담에도 일본 당국이 선뜻 금리 인상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정체된 임금 때문으로 분석된다. 임금 상승이 인플레이션의 주요인으로 지목되는 미국과 달리 임금이 수십 년째 답보 상태인 일본에서는 금리가 오를 경우 가계 부담이 크게 가중되기 때문이다. 스즈키 재무상도 “엔화 가치가 하락하고 수입 원가가 상승해도 임금이 오르는 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지금은 임금 상승이 약해 (엔화 약세의) 부정적 측면이 더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은 장기 불황을 거치면서 사람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았던 탓에 노동생산성이 낮다”며 “생산성이 오르지 않는 한 임금 인상은 어렵고, 이 경우 금융 완화에서도 헤어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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