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책자, 평생 간직할 기념품, 영국 축구의 중요한 요소.”
매치데이 프로그램(matchday programme·이하 프로그램)에 대한 영국 대중지 미러의 소개다. ‘영국에서 축구 경기를 관람할 때 맥주, 고기 파이와 함께 프로그램을 사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로그램은 영국 전통의 축구 문화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프로그램은 영국 축구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0년대 애스턴 빌라가 클럽 최초로 프로그램을 제작했으니 약 14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정기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한 첫 번째 클럽은 에버턴으로 기록돼 있다. 1960년대 영국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프로그램을 수집하는 취미가 유행했으며 자연스럽게 전문 수집가와 판매자도 등장했다. 2018년까지는 잉글리시 풋볼리그(EFL·2~4부)에 소속된 모든 클럽은 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제작해야 한다는 자체 규정도 있었다.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각 구단에서 제작하는 프로그램의 판매가는 평균 3.5파운드(약 5400원).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결승전과 같은 특별한 경기는 가격이 보다 높게 책정된다. 올해 5월 리버풀과 첼시의 FA컵 결승전 프로그램은 10파운드(약 1만 5500원)에 판매됐다. 역사적 가치를 지닌 프로그램은 경매를 통해 상상을 초월한 가격에 팔리기도 한다. 영국 일간 더선에 따르면 올드 에토니언스와 블랙번 로버스가 맞붙은 1882년 FA컵 결승전 프로그램이 2013년 경매로 3만 5250파운드(약 5560만 원)에 낙찰돼 세계 기록을 세웠다.
영국 축구의 역사이자 하나의 문화가 된 프로그램. 하지만 한국 축구에서는 다소 생소한 문화일 수밖에 없다. 14일 끝난 6월 대표팀의 A매치 4연전 중 브라질전과 칠레전에 맞춰 약 25년 만에 A매치 프로그램이 부활했으니 말이다. 대한축구협회에 따르면 1990년대를 끝으로 공식적인 단일 경기 프로그램 제작이 중단됐다. ‘매치데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이번 프로그램은 브라질전이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칠레전이 열린 대전월드컵경기장 주변에서 3000원에 판매됐다. 결과는 처참했다. 2경기에 10만 명이 넘는 팬들이 경기장을 찾았지만 프로그램 판매량은 관중 수의 100분의 1인 1000부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축구협회와 프로그램 제작을 협업한 김창환 베스트일레븐 이사는 “예상했던 분량의 10%밖에 팔리지 않았다”며 “A매치 4연전을 살펴보니 10대와 20대가 주 관람객이었다. 축구를 보고 소비하는 문화가 한국과 유럽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판매량과 수익만 놓고 보면 실패한 사업이지만 시도 자체는 긍정적이었다. 김 이사는 “‘왜 이런 프로그램이 이제서야 만들어졌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하나의 축구 문화를 소개하고 도전해봤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축구 K리그도 과거에 비슷한 경험했다. FC서울은 2004년부터 2017년까지 14년간 홈경기마다 ‘매치데이 매거진’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가격도 1000원으로 저렴했다. 하지만 올해를 기준으로 판매용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K리그 팀은 전무하다. 성민 FC서울 홍보팀 차장은 제작을 중단한 이유에 대해 “빅매치라고 할 수 있는 수원과의 슈퍼매치에서도 많아야 700~800권이 팔렸다. 어쩔 수 없이 판매량과 수익적인 부분을 고려해야 했다”면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팬들을 위한 다양한 플랫폼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팬들의 취향과 트렌드에 맞는 한국형 매치데이 프로그램이 국내 축구 붐업의 묘수가 될 수 있을까.
/서재원 기자 jwseo@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