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타 차 선두로 출발한 임희정(22·한국토지신탁)은 마지막 홀 짧은 파 퍼트를 넣고 나서야 비로소 별명인 ‘예쁜 사막여우’의 미소를 지었다.
애를 태우며 고대하던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시즌 첫 우승을 내셔널 타이틀이 걸린 메이저 대회 트로피로 장식한 순간이었다.
임희정은 19일 충북 음성의 레인보우힐스CC(파72)에서 열린 DB그룹 제36회 한국여자오픈(총상금 12억 원) 4라운드에서 3언더파 69타를 쳐 최종 합계 19언더파 269타로 정상에 올랐다.
이번 시즌 개막을 앞두고 임희정을 ‘1인자’ 후보에 포함시키기에 주저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지난해 1승을 보태며 대상 포인트 2위에 오르는 등 경기력과 스윙, 인기에서 최정상급인 선수다.
하지만 임희정은 올 시즌 들어 부진을 겪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의 영향이 컸다. 4월 11일 자신의 시즌 첫 출전 대회로 예정됐던 메디힐 챔피언십 직전 열린 프로암 경기 참가를 위해 골프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자동차를 폐차해야 할 정도의 사고에도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후유증은 계속됐다. 두산 매치플레이 3위 이외엔 톱 10에 한 번도 들지 못했고, 데뷔 시즌 이후 6위 밖으로 밀린 적 없는 평균타수 부문에서 이번 대회 전까지 10위에 처져 있었다.
완전하지 않은 몸 상태에 비해 임희정의 플레이는 완벽에 가까웠다. 2위 권서연(21)과 6타 차 완승을 거뒀고, 한국 여자오픈 역대 72홀 최소타 기록을 갈아치웠다. 종전 기록은 지난해 우승자 박민지(24)와 2018년 챔피언 오지현(26)이 세운 17언더파 271타였다. 임희정은 전날 54홀 최소타(200타)에 이어 이틀 연속 신기록 행진을 벌였다. 나흘 내내 60대 타수를 적어낸 것도 유일했다.
데뷔 시즌 3승, 지난해 1승을 거둔 임희정은 통산 5승째를 수확했다. 지난해 8월 하이원리조트 여자오픈 제패 이후 11개월 만의 우승이며, 메이저 정상은 2019년 KB금융 스타챔피언십 이후 두 번째다. 우승 상금 3억 원을 받은 그는 시즌 상금 4억 619만 원을 쌓아 이 부문 23위에서 단숨에 2위로 솟구쳤다.
임희정과 2위 박민지의 타수 차가 워낙 커 이날 관심사는 ‘누가’보다는 ‘어떻게’ 우승하느냐였다.
초반엔 ‘타수 차이가 있어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한 임희정과 ‘2등과 꼴찌는 다르지 않다’고 밝힌 박민지의 버디 경쟁이 펼쳐졌다. 임희정이 1번(파5)과 2번 홀(파4) 연속 버디를 잡자 박민지는 2, 4, 5번 홀 버디로 간격을 5타 차로 줄였다. 그러나 임희정은 7번(파5)과 11번 홀(파3)에서 버디를 잡아 6타 차이를 지켰다. 임희정이 15번 홀(파4)에서 이날 유일한 보기를 적어내고 16번 홀(파5)에서 박민지가 버디를 뽑아내면서 4타 차로 좁혀지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막판까지 공세로 나선 박민지는 17번(파3)과 18번 홀(파4)에서 연달아 볼을 깊은 러프로 보내며 언플레이어블(1벌타)을 선언했다. 두 홀을 더블보기-보기로 마무리한 박민지는 3위(12언더파)로 밀렸고, 임희정은 마지막 3개 홀에서 침착하게 파를 지킨 뒤 축하 물세례를 받았다.
신인 권서연은 버디 5개에 보기 1개를 곁들여 4타를 줄인 끝에 준우승(13언더파)을 차지했다. 4월 넥센·세인트나인 마스터즈 2위에 이어 이번 시즌 두 번째 준우승이다. 박민지는 시즌 세 번째 타이틀 방어를 이뤄내지 못했지만 3위로 디펜딩 챔피언의 체면은 세웠고, 7500만 원의 상금을 보태 상금 랭킹 1위(4억 9403만 원)를 지켰다. 서어진(21)이 이날 11번 홀(파3)에서 홀인원을 해 한국 여자오픈 사상 최다 홀인원(5개) 기록도 새로 썼다.
임희정은 “교통사고 이후 심적인 부담과 어려움이 컸는데 이번 대회 1, 2라운드를 치르면서 샷 감각을 찾았다”면서 “어려운 코스에서 좋은 스코어를 기록한 내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오늘 (박)민지 언니가 시종 공격적인 플레이로 나서 타수 차가 커도 안심할 수 없었다”며 “올 시즌 목표는 3승”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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