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국가가 초강력 긴축에 나선 가운데 일본은 돈 풀기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17일 기준금리(-0.1%) 동결과 함께 “현재의 양적 완화를 유지한다”며 ‘마이웨이’를 선언했다. 달러당 135엔까지 추락한 엔화 가치가 더 떨어져도 괘념치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엔화 가치는 올해만 14%, 최근 1년 사이 19%나 곤두박질쳤다. 일본의 통화 운용은 전통 경제정책에 역행하는 조치다. ‘엔저→수출 경쟁력 제고→기업 실적 향상→임금 인상→소비 확대’를 노린 전략이지만 물가 급등을 감수하는 ‘도박’이다. 일본 자산의 투자수익률 저하로 해외 자본이 이탈하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경제 체질 약화에 따른 ‘나쁜 엔저’가 ‘더 나쁜 엔저’를 부르고 국가 신용등급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 더 걱정되는 것은 엔저가 몰고 올 글로벌 동반 불안이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 고문인 짐 오닐은 “달러당 150엔이 되면 아시아에 새로운 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엔저에 대응한 중국의 위안화 약세 유도 등 연쇄 충격으로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 수준의 혼란을 부를 수 있다는 관측이다.
그래도 엔화는 기축통화라 일본이 상대적으로 위기에서 빨리 탈출할 수 있지만 우리는 다르다. 5월 말 외환보유액이 4477억 원이지만 위기가 커지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 일본과의 수출 경합도가 지난해 0.458로 2015년(0.487)보다 떨어졌어도 경기 침체기 기업들에는 큰 부담이다. 정부는 엔저의 파장을 면밀히 분석하고 대응책을 선제적으로 찾아야 한다. 주요국과의 통화 스와프 체결 등 안전판을 구축하고 중소기업 운전자금 지원을 늘려 원자재 가격과 환율 부담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 나라 곳간 부실화 막기와 구조 개혁, 산업 구조조정 등으로 체질을 강화하지 않으면 밀려오는 위기의 쓰나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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