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속) 장군을 비롯한 인물들은 자기가 희생자라고 믿으면서 가해자적, 폭력적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 때문에 폭력과 광기를 자아내기도 하죠.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누가 집권하든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 같아 어느 순간 불편하게 다가왔어요. 그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연극 ‘맨 끝줄 소년’, ‘애들러와 깁’, ‘괴물B’ 등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손원정(사진) 연출가가 이번엔 고대 그리스 비극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돌아왔다. 고대 그리스 고전 비극 ‘트라키스의 여인들’을 2000년대 초반 이라크전 당시 영국을 배경으로 각색한 ‘잔인하게, 부드럽게’다. 손 연출가는 27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2015년 국립극단의 제안으로 마틴 크림프의 희곡을 직접 번역한 후 낭독 행사를 했는데, 언젠가 극으로 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작품은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내 간 치정극이라는 원작의 뼈대는 유지하되 권력자들이 정의의 명목으로 폭력을 자행하는 민낯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연극은 한 장군이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대테러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아내 아멜리아에게 현지에서 데려온 소녀 레일라를 맡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후 대테러 작전은 명분일 뿐 장군이 레일라를 갖겠다는 목적으로 도시를 초토화한 것으로 밝혀진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장군은 육신이 망가진 채 집에 돌아와 정의와 평화를 위해 행동한 자신이 희생자라며 미쳐간다.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무자비하면서도 자신의 폭력은 정당화하면서 스스로를 희생자이자 제물로 포장한다. 무대는 이 때문에 파멸하는 모습을 전시하는 듯한 콘셉트로 꾸민다.
그리스 고전이 바탕이라 세밀한 캐릭터, 현실의 리얼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현대극과는 다르다. 하지만 손 연출가는 “굵직한 서사와 강렬한 캐릭터가 인상적이었고 일종의 해소감을 줬다”며 “복잡하지 않은 인물의 특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도 그 속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으면 했다”고 말했다. 정치적 사안에 관심은 없지만 그간 다룬 작품들이 사회적 메시지가 가득한 데 대해서는 “작품에서 직접 정치적 발언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예술이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떨어질 수 없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공연은 다음 달 1일부터 10일까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