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여운이 남는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스며든 그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그들의 대화도 곱씹게 된다. 감정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 영화 ‘헤어질 결심’이다.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은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 해준(박해일)이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해준은 남편의 사고사에도 당황하지 않는 서래를 보고 의심한다. 평소 불면증이 심한 해준은 서래를 염탐하기 위한 잠복수사를 밥 먹듯이 하며 그녀를 더 깊게 알아간다. 취조실에서 단둘이서만 심문하는 과정은 연애 단계 같기도 하다. 그렇게 의심은 곧 관심으로, 시선은 사건에서 서래에게로 향한다.
형사와 용의자의 사랑이라는 설정은 뻔하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뻔하게 풀지 않았다. 금기시되는 관계의 불붙는 사랑이 아닌, 감정을 억누르면서 서서히 커져가는 어른들의 사랑에 초점을 뒀다. 진한 스킨십보다 한 번의 눈빛이 더 강하다는 걸 강조한다.
개성 강한 캐릭터는 흥미를 이끈다. 해준은 기존의 폭력적이고 거친 형사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일상이 일로 굴러갈 정도로 직업정신이 투철하다.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수사 도구들을 넣어 다니기 위해 상의 주머니 12개, 바지 주머니 6개가 달린 옷을 맞춰 입는다. 늘 단정하고 깔끔하다. 차분한 문어체 말투도 특징이다. 서래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중국인인 그는 사극으로 한국어를 배워 고풍스러운 어투를 사용한다. 속을 쉽게 알 수 없게 의뭉스러워 보이지만 때론 과감하다. 이런 두 사람은 서로를 ‘같은 종족’이라고 할 만큼 통하는 구석이 있다.
‘디테일의 장인’ 박 감독의 감각적인 미장센은 가장 큰 재미다. 독특한 어투를 사용하는 두 사람은 ‘마침내’ ‘붕괴’ 같은 단어 하나에도 감정이 연결돼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나 묵직한 감정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서래를 왜 외국인으로 설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비롭지만 정의할 수 없는 청록색은 곳곳에 등장한다. 서래의 집 벽지, 살인사건의 단서가 된 서래의 원피스도 청록색이고, 흐름의 중심이 되는 산과 바다는 때에 따라 청색과 녹색으로 보인다. 모호한 이들의 관계를 심리를 상징한다.
박 감독이 작품의 출발이었다고 밝힌 가수 정훈희의 ‘안개’ 또한 중요한 요소다. ‘안개’는 작품 내내 흘러나오는 주제가 같은 곡이다. 해준과 서래가 재회하는 2막의 배경은 안개 낀 도시 이포다. 해준의 아내 정안 (이정현)이 우연히 만난 서래를 보고 “여기 사람들은 안개 때문에 여길 떠나려고 하는데 안개 때문에 왔다니 진짜 이유가 뭐냐”고 묻는 장면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해준과 서래의 짐작할 수 없는 거리와 모호한 관계,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좇는 것 등이다.
138분을 끌고 가는 작품의 힘은 오로지 ‘감정’이다. 박 감독의 전작들에서 당연시되던 선정적, 폭력적인 자극성은 없다. 애정신 수위 또한 지극히 낮다. 서서히 스며들게 하다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격정이 이 작품의 기승전결이다. 쉽게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다가 종국에 참아온 감정이 터지는 것이 더 크게 다가온다.
분위기를 무겁게 끌고 가지 않으려 노력한 부분도 엿보인다. 코미디언 김신영의 등장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해준의 후배 형사 연수 역인 그는 작품을 환기시키는 역할이지만 코믹 담당은 아니다. 1막의 형사 수완(고경표)과 대비되는 캐릭터로서 확실한 노릇을 한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박정민, 빽빽한 긴장감 속에서 유머를 던지는 이정현, 박용우 등을 보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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