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9회째를 맞은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코로나19의 엔데믹화(풍토병화) 흐름 속에 22일간 총 27회의 공연을 선보이는 역대 최대·최장 규모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5년째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개막공연에서부터 대자연을 찬미하는 실험적 현대음악을 들고 나오며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인간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겪으며 자연의 위대함과 무서움을 절감한 후 다음 시대를 고민하는 모습과 함께 내년 20주년을 맞이하는 음악제의 다음 걸음에 관한 고민이 드러나는 공연이었다.
지난 2일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리조트 내 뮤직텐트로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공연을 보려는 관객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음악제 사무국에 따르면 이날 공연을 보기 위해 티켓을 예매한 관객은 800여명으로, 현장판매분을 합하면 그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공연의 막이 오르자, 타악기 연주자 매튜 에른스터가 무대에 놓여 있던 다양한 크기의 화분 네 개를 이용해 프레데릭 르제프스키의 ‘대지에(To The Earth)’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와 함께 에른스터는 고대 그리스의 시 ‘호메로스 찬가’ 중 “대지의 여신:가이아에게’를 읊으며 “위대한 대지여, 당신은 생명을 불어넣는 힘과 죽을 때를 맞이한 이들에게서 그 모두를 앗아가는 힘을 지녔네”라고 말했다. 무대 뒤 화면엔 한국어로 번역한 시의 자막을 띄웠다.
그 다음으로 손열음과 플루티스트 조성현, 첼리스트 김두민이 미국의 아방가르드 작곡가 조지 크럼의 ‘고래의 노래’를 연주했다. 세 사람은 마스크로 눈을 가린 채 등장해서는 자연 그대로의 거칠고 예민하면서도 몽환적인 소리를 표현했다. 손열음은 피아노 건반 외에 내부의 현을 손과 막대로 건드리며 연주하고, 조성현은 플루트를 연주하는 동시에 입으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냈으며, 김두민도 첼로로 날카로운 음색을 내뿜었다. 손열음은 지난 5월 기자간담회에서 개막공연 프로그램에 대해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하나의 시대가 지나가고 다음 시대가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런 의미에서 최근 돌아가신 두 분의 작품을 내세웠다고 설명한 바 있다.
공연 후반부에는 세계 최고 권위의 실내악 콩쿠르인 위그모어 홀 국제 현악 사중주 콩쿠르에서 2018년 우승했던 에스메 콰르텟이 나와 코른골트의 현악 사중주 2번을 연주했다. 이들은 프랑스 출신 모딜리아니 콰르텟과 함께 멘델스존의 현악 팔중주 Op.20도 선보였으며, 큰 환호 속에 예정에 없던 앵콜도 했다.
올해 평창대관령음악제는 ‘마스크(MASK)’를 주제로 메인콘서트 18회를 비롯해 스페셜콘서트 4회, 찾아가는 음악회 5회 등을 선보인다. 행사 시점을 7월 초로 당기고, 기간을 종전 2주에서 3주로 늘리며 장기간형 축제로의 변화도 꾀했다.
팬데믹 속에 지난 2년간 국내 음악인 중심으로 열린 것과 달리 올해는 예년처럼 해외 아티스트들도 대거 무대에 오른다. 성악가들이 가곡을 부르는 프로그램인 '시와 음악의 밤'도 처음 마련해 소프라노 임선혜와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멜니코프가 함께 공연한다. 멜니코프의 리사이틀, 첼리스트 레오나드 엘셴브로이히와 손열음의 듀오 리사이틀 등 다수의 독주회와 듀오 리사이틀 무대도 마련된다.
국내 음악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아카데미 프로그램도 준비해, 많은 음악인들이 도약하는 발판이 되고 싶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음악제 측은 가면을 뜻하기도 하는 마스크가 “페르소나(persona), 퍼슨(person), 퍼스낼리티(personality)와 같은 단어로 연결된다”며 “작곡가와 연주자 등 다양한 예술가들을 조명한다”고 전했다.
평창=박준호기자 violato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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