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30년간 기회주의와 광신·허위·욕정·위선·비겁으로 얼룩진 우울한 일련의 사건을 목격했다. 이 글은 자신이 얻을 지위의 가치에 비해 하찮기 그지없는 ‘여성의 권리’를 내던짐으로써 권력을 얻은 남성들에 관한 이야기다.
사건은 케네벙크포트에 있는 조지 H W 부시의 별장에서 시작됐다. 필자는 백악관 출입기자로 현장에서 취재 중이었다. 그날 부시는 43세의 클레어런스 토머스 연방고등법원 판사를 은퇴하는 서굿 마셜 대법관의 후임으로 지명했다.
지명 발표 이후 온갖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하워드 메첸바움 상원의원은 토머스 판사의 낙태 관련 판결 기록부터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인준 과정에서 여성의 선택권에 침묵으로 일관하다 일단 대법원에 들어가면 낙태권을 폐기하려 아우성을 치는 또 한 명의 레이건·부시 지명자를 절대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토머스는 진보 진영의 걸출한 대변자이자 민권의 수호자인 마셜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기여한 어퍼머티브액션(소수계우대법)에 반대했고 반낙태행동주의자들의 수호자 행세를 했다.
부시와 그의 부친은 가족계획연합을 지지해온 뉴잉글랜드 성공회 신도였다. 부친인 스콧 부시는 이미 1940년대부터 가족계획연합을 지지했고 한때 이 단체의 기금 모금 캠페인 책임자로 활동했다. 텍사스 출신 하원의원이었던 부시 또한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가족계획운동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러나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부시는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쪽으로 재빨리 돌아섰다. 하지만 우파가 좀처럼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자 재선을 의식한 부시는 극보수 성향의 토머스를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이어 3개월 후 열린 대법관 지명자 인준 청문회에서 애니타 힐은 상관인 토머스가 수시로 추근대고 성적 괴롭힘을 가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인준 청문회를 주재한 상원 법사위 위원장은 조 바이든이었다. 바이든은 공화당 의원들이 힐을 무참하게 헤집어놓도록 방치했고, 갑자기 청문회를 중단했으며, 힐의 증언을 뒷받침해줄 증인 두 명의 출석을 취소했다. 백인 일색인 상원 법사위 소속 의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둘의 관계를 어그러진 직장 로맨스 정도로 여겼다. 의원들 사이에서는 토머스에 대한 동정론이 우세했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전 여친이 아무 증거도 없이 그의 인생을 갈가리 찢어놓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흑인 여성인 힐은 위증을 한 색정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바이든은 민주당 의원들이 법사위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거짓말쟁이에 변태이자 성희롱자가 종신 대법관으로 신분 상승하는 것을 허용했다.
보수적인 동료 의원들과 초당파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싶어하던 바이든은 여성권을 뒷전으로 밀쳐뒀다. 결국 토머스가 대법관에 임명됨으로써 보수주의자들은 최초의 급진적 우익 법관이라는 강력한 지원군을 얻게 됐다. 이어 충격적인 성적 이탈의 역사를 가진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공화당과 보수 종교인들은 가정의 가치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게 됐다. 보수 진영은 트럼프야말로 그들에게 마법의 칼을 가져다 줄 극우 전사임을 알아차렸다.
케네벙크포트에서 부시가 대법관 지명 발표를 하던 날 토머스는 조지아 벽촌 소작인이었던 조부모 밑에서 자란 과거사를 언급했다. 그러나 대법관이 된 후 그는 빈민과 사회·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에 고통을 안겨주는 의견을 속속 내놓았다.
그의 백인 아내가 트럼프의 쿠데타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 토머스는 대법원에서 열혈 우익 극단주의 대법관들의 쿠데타를 이끌었다. 그들은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권한을 빼앗았고 미국민의 다수 의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지난 목요일 총기 난사 돌림병의 한가운데서 의회가 마침내 온건한 총기규제법을 통과시켰지만 토머스는 뉴욕주의 공공장소 총기휴대규제법을 뒤집는 다수 의견을 썼다. 지난주 대법관들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제1차 수정헌법 조항을 약화시키는 판결도 내놓았다. 이제 그들은 환경보호법과 정부의 기업 규제 권한을 무력화하거나 아예 제거하려 들 것이다.
현재 대법원은 통제 불능 상태이고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특히 클레어런스 토머스는 우리의 생활 방식을 멋대로 지시하는 무책임한 극단주의자들과 함께 오늘 이 자리까지 우리를 몰고 왔다. 그리고 이는 대단히 역겨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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