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중동 등 해외건설 시장에서 큰 장이 서고 있는데 국내 건설사들은 각종 규제에 발목이 잡혀 수주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규제를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대신 해외건설 현장의 특성을 감안하는 융통성을 발휘해 K건설이 과거의 수출 역군 자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건설 업계 관계자)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수주가 위축되는 가운데 주 52시간 근로제 등 각종 규제가 해외건설 현장에까지 획일적으로 적용되면서 수주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6일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건설사의 해외건설 사업 수주 실적은 120억 4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147억 4700만 달러)보다 약 18.4% 감소했다. 특히 국내 건설사의 해외 수주 텃밭으로 꼽히는 중동 시장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상반기 중동 지역 수주액은 28억 600만 달러로 전년 동기(41억 2800만 달러) 대비 32% 줄었다. 이 밖에 유럽(-4.3%), 중남미(-65.4%), 북미·태평양(-88.2%) 지역의 수주액도 쪼그라든 것으로 나타났다.
올 상반기 해외 실적 감소는 지난 2년간 이어진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인프라 사업의 발주 물량이 급감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와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원자재 가격이 치솟으며 해외사업 여건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실제 A 건설사는 4월 열린 해외건설 대기업 간담회에서 정부와 협회 측에 코로나19 사태 이후 영업과 프로젝트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B 건설사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상반기에 계획한 사업들이 지연되면서 사태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 C 건설사 역시 러시아에서 수주한 액화천연가스(LNG) 플랜트 공사에 차질을 빚고 있다.
문제는 추후 해외건설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사업 수주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주 52시간 근로제 등 국내 규제가 해외건설 현장의 여건과 상관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탓이다. 이를테면 국가마다 우기나 폭염 등 기후 환경에 따라 공사가 불가능한 날이 많은데 근무시간을 제한하다 보니 공기를 맞추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건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동이나 동남아 국가 등에서 인프라나 플랜트를 건설할 때 날씨로 인해 작업하지 못하는 일이 잦다”며 “밀린 작업들은 가능한 날에 최대한 진행해야 하는데 근무시간이 제한돼 있어 발주처에서 요구한 공기 내 공사를 마무리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주 52시간제를 맞추기 위해 현장 인력을 늘리면서 원가 상승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해외건설 현장에서 현지 근로자는 주 52시간을 적용받지 않지만 이들을 관리·감독할 내국인 근로자는 적용 대상이라 추가 근무를 위해서는 관리·감독 인력을 추가로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해외 현장에 대한 근무 기피 현상은 갈수록 커져 인력 확보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는 현장 작업 능률이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등 수주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국내 건설사의 해외건설 시장 수주 기회는 축소되고 내국인의 고용 감소까지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건설 업계는 해외건설 현장에 대해서는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을 예외로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올 하반기부터는 중동 국가를 중심으로 대형 프로젝트 발주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며 수주 경쟁력 확보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5000억 달러(약 640조 원)가 투입되는 사우디아라비아 신도시 ‘네옴 시티’ 프로젝트를 둘러싼 수주전이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라진성 이지스자산운용 팀장은 “지난해에 이어 유가 고공행진으로 부를 축적한 중동 산유국들이 투자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며 “전통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한 석유 및 가스·화학 부문과 함께 탄소 중립을 중점으로 한 신재생에너지 전환 프로젝트 발주까지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서둘러 제도 개선안 찾기에 나서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이날 출범시킨 ‘국토교통 규제개혁위원회’는 8대 중요 규제 혁신 과제 중 하나로 ‘건설 산업 활력 제고를 위한 과감한 규제 혁신’을 꼽았다. 해외건설 현장에서 적용하고 있는 주 52시간 근로제의 개선 방안도 함께 검토한다는 계획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건설 업계의 규제 개선 건의가 지속적으로 이뤄진 만큼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토론을 진행할 것”이라며 “관계 부처와 협의가 필요한 사안인 만큼 구체적인 방안이나 개선안 마련 시기를 언급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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