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께 지인에게 휴대폰을 도둑맞은 A씨는 한 인터넷은행 계좌를 통해 5920만원의 대출 피해를 당했다. A씨 측은 “신분증 원본이 아닌 휴대폰으로 촬영한 운전 면허증 사진만으로 본인 인증이 통과됐다”면서 “범죄자는 구속됐지만 여전히 대출 변제금을 독촉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A씨의 사례처럼 신분증 사본으로도 비대면 실명확인이 가능한 허점을 악용한 대출사기가 전국에서 속출하고 있다. 18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서울 종로구 경실련 강당에서 ‘금융사 엉터리 핀테크 비대면 실명확인 금융사고 피해자 고발대회’를 열고 신분증 사본으로 제3자에 의한 대출 사기를 당한 사례를 공개했다.
경실련은 이날 스미싱, 피싱 등으로 유출된 신분증 사본이 ‘비대면 대포폰 개통→대포통장 개설→비대면 대출사기·무단 인출’로 악용되고 있지만 금융사들의 대책 마련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실련은 “국내 5대 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중 신분증 원본대조가 가능한 진위 확인 시스템을 갖춘 모바일뱅킹은 현재 단 한 곳도 없다”면서 “핀테크 시장에는 인증 기술이 있지만 시중은행 등은 네트워크 설비투자 비용, 지점운영비, 인건비 등을 이유로 고의로 도입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실련은 정부가 관련 가이드라인을 내놓아도 강제성이 없어 엉터리 비대면 실명확인 시스템이 방치되고 있다고 짚었다. 경실련은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예금자보호법, 전자금융거래법 등 사고 비용을 보전할 법과 제도가 있지만 금융회사와 금융 당국 등은 피해자의 중과실 책임만 따지고 엉터리 접근 매체를 활용한 시스템 하자와 불법행위, 사고 책임 등에 대해서는 방치하고 있다”고 했다.
김호윤 경실련 금융개혁위원(변호사)는 “신분증 사본 확인은 명백한 금융실명법 위반임에도 금융회사들은 적반하장격으로 피해자를 소송으로 내몰고 피해구제는 지연되고 있다”면서 “원스톱 금융소비자 피해구제를 통해 민·형사 사건 대응이 이뤄지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피해자들이 소송으로 더 이상 몰리지 않도록 금융회사에 입증책임을 묻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경찰 신고가 접수되면 대출사기 피해자에 대한 금융회사의 권리 행사를 정지시켜야 한다”면서 “채무면책을 지원하는 금융감독기구와 경찰, 한국소비자원 등이 참여하는 금융기관 조정기구를 설치해 피해자들이 일일이 채무부존재 확인과 소송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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