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정부가 국가재정계획운용을 긴축으로 전환하고 국가 재정 적자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국가 재정의 건전 관리는 국가 신용등급 유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경제위기 대처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예산의 일률적 삭감이다.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도 동일한 잣대가 적용된다면 약간의 배고픔을 못 이기고 봄에 심을 씨앗을 먹어버리는 농부의 우를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97년 우리가 겪었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는 여러 가지 상처를 남겼는데 가장 큰 후유증 가운데 하나는 ‘이공계 기피’가 아니었을까 한다. 경제적 어려움이 눈앞에 닥친 기업들은 생산과 직접적 연관이 적은 R&D 관련 예산과 인원을 삭감해 버렸다. 이에 우수한 젊은이들이 이공계 진학을 기피했고 이후 과학기술 혁신 역량 향상에 어려움을 겪은 것이 사실이다. R&D 축소가 단기적으로 도움이 됐을지 모르지만 미래 성장 기반을 없앤 어리석은 조치였다는 것이 후일의 평가다.
R&D 투자는 미래에 대한 투자다. 즉시 가시적 결과가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미래를 내다봐야 하는 국가나 기업에는 더없이 중요하다. 당장 사정이 좋지 않다고 R&D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국가와 기업의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R&D에서 1년의 기회로 향후 10년을 준비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요즘처럼 경제와 산업이 어려울수록 R&D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정부는 그동안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R&D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R&D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R&D 투자는 일자리 창출뿐 아니라 경제성장에도 크게 기여한다. 기업 R&D 투자가 1조 원 증가할 때마다 1만 3000여 개의 일자리가 생긴다. 1인당 GDP도 200달러 이상 늘어난다는 분석 결과도 있다. 이렇듯 R&D 투자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특히 반도체·인공지능(AI)·항공우주·바이오헬스 등 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글로벌 기술 경쟁이 심화되는 요즘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최근 허준이 교수가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나오는 것도 머지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달에도 우리 기술로 개발한 누리호가 발사에 성공해 대한민국은 세계 7번째 발사체 보유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렇게 계속된 경사는 그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정부가 지속적으로 과학기술 R&D에 투자한 노력의 결실이며, 이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혁신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우리 경제는 현재 대내외 불안 요인으로 성장률 목표 하향 조정이 잇따르는 등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기업들도 어려운 상황이라 R&D 투자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R&D 투자는 성장의 자양제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봐왔다. 정부는 직접 투자와 함께 획기적인 규제 완화, 세제 지원 등을 통해 민간 R&D 투자를 늘리도록 유도해야 한다. 지금 세계에서는 글로벌 기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 전방위 경쟁이 치열하다. 또 대내적으로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를 뛰어넘어 선도자(first mover)로 거듭나기 위한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일수록 정부의 R&D 투자는 혁신 촉발의 마중물로 꼭 필요하다. 부디 정부는 과학기술 R&D 투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앞서 말한 농부의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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