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화국 황태자’로 불리며 한때 대권주자로 꼽혔던 검사장 출신 정치인의 회고록이 요즘 판사들 사이에서 화제다. 윤석열 대통령, 홍준표 경남지사 등과 함께 검찰 출신 정치인으로는 상징적 인물로 꼽히는 박철언 전 국회의원의 저서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이다. 이 책에는 박 전 의원이 청와대 비서관 등을 지내며 대법관을 비롯한 주요 인사 추천·검증을 주도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판사들은 여기서 윤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소통령’으로 불리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떠올린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의 첫 대법관 후보 검증을 대법원이 맡으면서 법무부의 개입 우려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법무부의 인사 검증 대상 규정이 없는 데다 과거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검찰의 법관 사찰 의혹도 불거졌던 만큼 사법부의 법무부 불신은 쉽게 가시지 않을 전망이다.
박 전 의원은 서울대 법대, 사법고시 8회 출신으로 검찰에서는 검사장(법무연수원 연구위원)까지 올랐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5공화국 때 정무비서관과 법률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을 지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한 6공화국 때는 청와대 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지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처 고종사촌 동생이자 ‘6공화국 황태자’로서 위세가 상당했다. 13·14·15대 국회의원까지 지내며 차기 대권 주자로까지 거론됐지만 1990년 내각제 개헌 합의 문제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진 뒤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5월 슬롯머신 업자에게 5억원을 받았다는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출소 후 자유민주연합 부총재를 지내며 재기를 노렸으나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 은퇴를 결심했다. 은퇴 후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전히 검찰 출신 유력 정치인들을 말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박 전 의원이다.
박 전 의원은 정계 은퇴 이듬해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펴냈다. 한권당 500페이지 가량 분량으로 총 두권으로 구성됐는데 여기에는 그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4명의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경험한 일들이 나와있다. 특히 그가 30여년간 만나고 경험한 정치인과 관료들의 이름이 실명으로 기록됐다. 그는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이 1990년 3당 합당 과정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40억원을 전달했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책에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 중 판사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박 전 의원이 청와대 정무비서관 시절 대법원장, 대법관 후보들은 직접 면접했다는 내용이다.
올해 6월 7일 법무부에 공직후보자 인사검증을 맡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설치되자 판사들 사이에서는 17년 전 나온 이 책이 다시 회자됐다. 인사정보관리단의 검증 대상에 대법관도 포함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법부 독립성 침해 우려가 확산됐기 때문이다. 한 부장판사는 “책을 보면 박 전 의원이 대법원장, 대법관 후보들을 직접 면접하고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장면이 나온다”며 “법무부가 대통령 요청이 있으면 모든 공직후보자를 검증할 수 있고 그 책임자가 대통령 최측근인 한 장관이기 때문에 여기서 박 전 의원이 오버랩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야권 정치인들도 이러한 문제를 집중해서 지적했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 장관 지명 직후 페이스북을 통해 "민정수석+검찰총장+인사검증처장+신수사처장+상설특검발동자= 윤석열 정부의 박철언"이라며 한 장관을 박 전 의원에 빗대 비판했다.
올해 9월 퇴임하는 김재형 대법관 후임자가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되는 첫 대법관이라는 점에서 이번 대법관 후보자 선정은 법조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선정 과정에서 ‘누가 되느냐’보다는 ‘누가 검증하느냐’에 관심이 집중됐다. 인사정보관리단 출범 전부터 최근까지도 정치권과 법조계에서는 한 장관의 법무부가 검증에 관여할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5공화국 때도 대법원장에게 제청권이 있었으나 박 전 의원이 후보자 추천과 검증을 주도했었다.
그동안 해온 것처럼 이번 대법관 검증도 대법원이 주도했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추천 받은 후보자 21명 중 3명을 추려 지난 14일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추천했고, 대법원장이 2주간 검증 과정을 거쳐 윤 대통령에게 오석준 제주지방법원장의 임명을 제청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관 제청권은 헌법상 대법원장에게 있으므로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있을 때도 대법원이 대법관 후보자를 검증했다”며 “이번 논란은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오해하면서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헌법 104조 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 장관도 최근 국회에 출석해 "대법관은 대통령이 제청을 받아서 임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인사 검증을 할 만한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대법관 후보 검증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내년 법무부 인사 검증 문제가 다시 불거질 수 있다. 이선애(3월) 헌법재판관, 이석태 헌법재판관(4월), 유남석 헌법재판소장(11월)의 임기가 내년 만료되기 때문이다. 두 명의 헌법재판관 지명권은 김 대법원장이 행사하지만 유 헌재소장의 경우 윤 대통령에게 지명권이 있다. 민정수석실이 사라진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추천자들에 대한 1차 인사 검증을 인사정보관리단에 위임하면 한 장관 책임 하에 인사 검증이 진행될 수 있다.
이달 28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한 장관에게 법무부 인사 검증 대상과 범위 규정이 있느냐는 질의가 쏟아졌다.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인사검증 범위와 대상, 직급에 따른 검증 절차나 방법을 정한 내규가 있느냐”고 묻자 한 장관은 "내규가 있지는 않다. 저희가 해당자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하는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
한 장관의 해명에도 법관들의 불신이 계속되는 이유는 사법부에 ‘사법농단’ 사건과 ‘판사사찰’ 트라우마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 행정권을 남용했다는 사법농단 사건의 수사팀장이 한 장관(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이었고 책임자는 윤 대통령(서울중앙지검장)이었다. 그때 전·현직 법관 100여명을 수사해 14명을 재판에 넘겼다.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일 때는 대검찰청 수사정보담당관실(수정관실)의 판사 사찰 의혹이 불거지며 판사들의 반감을 샀다.
사법부는 사법농단 수사 기록, 사찰 정보에 인사정보관리단의 검증 자료까지 검찰이 쥐게 되면 사법부 독립성 침해로 이어진다고 우려하고 있다. 대법관 최종 후보로 선정된 오 법원장 역시 지난해 국정감사 때 ‘판사 사찰 문건에 본인 세평이 포함됐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질의에 “저런 것이 뭐 심화되거나 확대, 발전되는 형태의 것이 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부장판사를 지낸 한 법조인은 “사법농단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은 전·현직 판사가 100명이 넘는다”며 “사법부 역사에 있어서 가장 치욕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고 말했다. 차기현 광주고법 판사는 지난달 인사정보관리단을 신설하는 대통령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법률신문 기고를 통해 “법무부 장관은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당연직 위원"이라며 “장관이 인사정보관리단을 통해 수집한 검증 자료와 검찰이 확보한 범죄정보 자료를 넘겨받아 대법관 추천 단계에서부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걱정이 든다”고 지적했다.
한 장관은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축적되는 개인정보에 대해서는 저한테도 사실상 로데이터(원자료)로 보고하지 않고 인사정보관리단에서 별도로 보관한다"고 해명했다.